▲박진수, 라면박진수, <라면>, 455×379, Oil on Canvas,2017
이윤옥
이날 모임은 지난 달 작품 전시를 성황리에 마치고 박 화백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마련한 자리였다. 20여 명 가까이 모인 까페통인에는 지난 번 전시회 때 선보이지 않았던 화사한 꽃 그림 몇 점이 벽에 걸려 있었다.
따로 격식이 있는 자리가 아니라 평소 박진수 화백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들이 모였다. 나는 박수근 화백과의 만남에 대한 질문을 첫 번째로 던졌다.
"제가 27살 때였을 겁니다. 박수근 화백께서 경주 남산의 돌부처 스케치를 하러 오셔서 한 달간 박수근 화백과 지낸 적이 있습니다. 물론 그때 저의 그림을 보여드렸지요. 그랬더니 대학 나온 사람 그림보다 좋다고 하시면서 계속 그리라는 말씀을 하셨지요. 경주 남산의 숱한 돌부처를 스케치하고 탁본하는 과정에서 박수근 선생의 감정이 절제된 화풍(畫風)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박진수 화백은 그림을 계속할 수 없었다. 박 화백이 살아온 시대는 그림으로 밥을 먹고 살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더욱이 사회주의계열의 독립운동을 한 어머니와 한국전쟁 이후 월북한 아버지로 인해 박 화백 가족은 빨갱이로 낙인찍혀 오래도록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았다.
그러다 보니 어린시절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소년의 꿈은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두어야만 했다. 그리고 가장으로 '먹고 사는 일'에 매달리다 육십 가까이 되어서야 본격적인 붓을 쥘 수 있었다. 그러나 육십의 나이까지 붓을 완전히 놓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손에서는 단 한 번도 스케치북이 떠난 적이 없으며 화가의 꿈을 접은 적이 없다.
내가 박진수 화백을 만난 것은 지난 2010년이었다. 그때 나는 여성독립운동가를 위한 책을 쓰기 시작하던 때로 이효정 지사의 삶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박진수 화백이 아들임을 알게 되었다. 비가 몹시 내리던 날, 어머니의 자료를 요청한 나를 위해 박 화백은 시집과 사진을 들고 광화문 사무실로 단걸음에 달려와 주었다.
여성독립운동가 책을 쓰면서 여러 후손을 만나보았지만 박진수 화백처럼 곧바로 자료를 제공해준 사람은 박 화백이 처음이었다. 대개는 6하 원칙을 들어 사진의 용도를 캐묻고도 미심쩍어 선뜻 사진 한 장 주기를 꺼렸다. 그러나 그때 박진수 화백은 용도도 묻지 않고 퍼붓는 빗속을 뚫고 달려와 어머니가 팔순에 쓴 시집을 품에서 꺼내 보여주었다.
"(앞줄임)그리도 즐기시던 쑥버무리 쑥절편
소담하게 담아 놓고
싸근한 들나물 무쳐 보리상반 밥에
달큰한 고추장 곁들여 비빈 밥
어머니와 도란도란 먹어 보고 싶다(뒷줄임)"
- 이효정 시집 '회상' 가운데
박진수 화백의 어머니, 독립운동가 이효정 지사의 시들은 하나 같이 한 폭의 수채화 그림 같았다. 살기 어려운 시절을 살아내면서도 따스한 인간냄새 물씬 풍기는 그런 시어들에 옷깃을 여몄던 기억이 새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