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 대신 삶을 예습하는 미국 청소년들

등록 2018.06.27 08:22수정 2018.06.27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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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내면서 호스트 가정에서 색다른 경험을 했다. 아침에 토스트기를 사용하려고 부엌에 나왔는데, 그 옆에 누군가 냉장고에서 꺼낸 청포도 한 송이가 놓여 있었다. 처음엔 그저 누가 먹으려고 꺼내둔 거라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 포도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다.


버릴려고 꺼내둔 건가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호스트 아빠가 가족 모두에게 "어제부터 포도가 여기 놓여 있는데 누가 꺼내 놓았지?"라고 물었고, 호스트 남매들은 모두 'Not me'라며 무신경하게 지나쳤다. 이 후에도 포도는 같은 자리에서 한동안 더 움직임이 없었고, 저녁 때 쯤 마침내 냉장고로 옮겨져 있었다.

아무도 포도에 신경쓰지 않은 이유는, 본인이 꺼낸 것이 아니라서다. 자신이 하지 않은  일에 대해 일절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것이다. 전에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고양이가 내 방 바닥에 토를 했을 때 호스트 아빠는 내게 'Not your cat'이기 때문에 너는 뒷처리할 필요가 없다며 고양이 주인인 호스트 자매가 정리하게 내버려둔 적이 있었다.

학교에서도 색다른 경험을 했다. 만나는 친구들마다 레스토랑, 마트, 맥도날드 같은 곳에서 알바를 하고 있었다. 친구들은 서로 어디서 일하니, 매니저는 좋은 사람이니 그런 질문들이 자연스러운 듯 했다. 마치 한국에서 "무슨 학원 다녀?", "선생님은 어때?"란 질문과 같았다.

어느 날, 몇몇 친구들이 나에게도 "너는 어디서 알바를 하니?"라고 물었다. 내가 알바를 하지 않는다라고 말하자 친구들이 의아해 하는 기색이 확연했다. 알바를 하지 않는 학생이 오히려 드물기 때문이다. 나는 교환학생이라 비자 때문에 일하지 못한다 라고 답하자 그제서야 납득이 된다는 눈치였다.

또한, 알바를 하는데 아무 걸림돌이 없는 평범한 미국 친구가 여태껏 일하던 알바를 그만두고 지금은 일을 쉬고 있다고 얘기하자, 다른 친구들이 알바를 아예 안 찾아보는 거냐며 놀라워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


일을 하지 않는다고 고백한 친구도 꽤 쑥스러워했다. 정신 혹은 신체 지체 장애가 있는 학생도 수영장에서 세이프가드 알바를 하니, 고등학생의 알바가 얼마나 보편적인지 알 수 있다.

호스트 부모가 자신의 자녀를 대하는 것을 지켜보니 왜 미국 학생들은 다들 학교 끝나고 알바를 하러 가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책임이란 걸 몸소 배우고 있다. 11살인 호스트 동생은 자폐증을 앓고 있지만 용돈을 거저 받는 일이 없다.


강아지 목욕시키기, 옷장 청소하기, 빨래 하기 등 무엇이든 노동을 해야 용돈을 받을 수 있다. 만 16세가 되면 응당 자신의 지출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게 미국 사회의 암묵적인 룰인 듯했다. 옷, 커피, 게임 등 여가활동은 물론이고 차 기름값, 핸드폰 요금 등 기본적인 지출도 당연히 본인이 부담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사고력이 큰 변화폭으로 확장되는 청소년 시기에 학업에 열중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청소년들이 어려서부터 사회생활을 경험하는 데에서 파생되는 이득을 무시하기엔 그 이득의 크기가 상당하다. 사회에선 이십대부터 오십대, 육십대까지 섞여 같은 공간에서 일한다. 십대들은 자신과 다른 세대들과 마주치면서 대화의 기술을 배우고, 삶의 노련함을 익힐 수 있다.

미국 학교에서 받은 문화충격 중 또다른 하나는, 학생과 교사 사이에서 캐주얼하게 대화가 오고 간다는 것이었다. 내 동갑 친구들이 교사들과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 농담을 주고 받는 것은 어른들을 대할 때 쭈뼛쭈뼛해지는 내 모습과 대조적이었다. 내가 그동안 수학을 예습해올 동안, 그들은 삶을 예습해 온 것이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타인을 상대해야 한다. 전공이나 직업과 관련이 없다면 고등학교 때까지 억지로 외워온 수학공식들은 몽땅 잊어버려도 되지만, 사람을 대하는 기술의 습득은 누구에게나 필연적인 과제다. 다양한 경험에 도전장을 내미는 십대들이 있다면, 그들을 독서실에만 가둬놓는 대신 사회를 경험할 기회를 주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미국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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