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간의 몽골알타이 답사단 일정에 동행했던 김윤희(왼쪽) 조현옥씨. 김윤희씨는 "이 나라사람들이 척박한 자연환경을 이겨내고 자연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모습이 좋았어요"라고 말했다. 조현옥씨는 "우리 시각으로 자연을 개발하지 말고 그대로 보존했으면 좋겠어요. 남자들 사이에서 생리문제를 해결할 때 우산도 가리고, 남자들 뒤로 돌아라고 한 후 별을 보면서 생리현상을 해결한 것도 재미있었던 경험이었어요"라고 말했다.
오문수
1909년 말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으로 체포됐다가 이듬해 풀려난 이태준은 안창호의 권유로 신민회의 자매 단체인 청년학우회에 가입했다. 이태준은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한국이 강제합병 된 다음해인 1911년 6월 2일 세브란스병원 의학교를 졸업(제2회)해 의술개업인허장(제92호)을 받았다.
1911년 말 일제가 애국지사들을 대량 검거하기 위해 이른바 105인 사건을 조작하자 김필순은 체포 위기에 빠진 이태준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할 것을 모의했다.
중국 남경에서 의술 펼치던 이태준... 김규식의 권유로 몽골 울란바토르로 옮겨 이태준은 중국 남경의 '기독회의원'에서 의술을 펼치다 처사촌인 김규식의 권유로 몽골 울란바토르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까우리(高麗) 의사 이태준은 '동의의국'이라는 병원을 개설해 성병퇴치에 앞장섰다. 몽골사람들은 그를 신인(神人) 혹은 '극락에서 강림한 여래불(如來佛)' 대하듯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