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울란바토르 한복판에 이태준 기념공원, 어떤 사연?

[몽골여행기 10] 몽골에서 인술 베풀며 독립운동에 몸바친 이태준

등록 2018.07.26 15:13수정 2018.07.26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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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알타이 답사단의 12일간(6.17~6.28)에 걸친 여행기를 연재합니다. 사막과 초원의 바다를 건너 거친 대자연이 어우러진 땅 몽골! 척박하고 불편한 땅에 살면서도 따뜻한 미소를 잃지 않는 유목민들.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기 위해 3000㎞ 이상의 긴 여정을 함께한 34명의 답사단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 기자말
 몽골 울란바토르에 있는 이태준 기념관 모습
몽골 울란바토르에 있는 이태준 기념관 모습오문수

몽골알타이 답사단 일행의 마지막 일정은 울란바토르 관광이다. 일행은 수흐바타르 광장을 거쳐 복드한 궁전박물관, 자연사박물관, 간당사를 거쳐 이태준 기념관으로 갔다.

몽골인들이 신인(神人) 대하듯 했던 이태준은 누구?
 이태준 기념관에 있는 이태준 흉상
이태준 기념관에 있는 이태준 흉상오문수

이태준은 1883년 11월 21일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명관리 1149번지에 태어났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반식민지 상태가 되고 다음해 부인을 잃자 상경해 세브란스병원 앞에 있던 김형제상회에 취직했다.


김형제상회는 제중원(세브란스병원) 의학도 김필순이 운영하던 곳으로 안창호 등 독립지사들의 비밀 회합장소였다. 이태준은 이들의 영향을 크게 받아 1907년 세브란스 의학교(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스승이자 동지인 김필순은 안창호와 의형제를 맺은 사이로 1908년 6월 졸업해 한국 최초의 의사 7명 중 1명이 돼 모교에 남아 후학을 가르치면서 일제 침략에 맞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수흐바타르 광장에서 전통복장을 입고 촬영에 응해준 몽골인들
수흐바타르 광장에서 전통복장을 입고 촬영에 응해준 몽골인들오문수

 12일간의 몽골알타이 답사단 일정에 동행했던 김윤희(왼쪽) 조현옥씨.  김윤희씨는 "이 나라사람들이 척박한 자연환경을 이겨내고 자연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모습이 좋았어요"라고 말했다. 조현옥씨는 "우리 시각으로 자연을 개발하지 말고 그대로 보존했으면 좋겠어요. 남자들 사이에서 생리문제를 해결할 때 우산도 가리고, 남자들 뒤로 돌아라고 한 후 별을 보면서 생리현상을 해결한 것도 재미있었던 경험이었어요"라고 말했다.
12일간의 몽골알타이 답사단 일정에 동행했던 김윤희(왼쪽) 조현옥씨. 김윤희씨는 "이 나라사람들이 척박한 자연환경을 이겨내고 자연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모습이 좋았어요"라고 말했다. 조현옥씨는 "우리 시각으로 자연을 개발하지 말고 그대로 보존했으면 좋겠어요. 남자들 사이에서 생리문제를 해결할 때 우산도 가리고, 남자들 뒤로 돌아라고 한 후 별을 보면서 생리현상을 해결한 것도 재미있었던 경험이었어요"라고 말했다. 오문수

1909년 말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으로 체포됐다가 이듬해 풀려난 이태준은 안창호의 권유로 신민회의 자매 단체인 청년학우회에 가입했다. 이태준은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한국이 강제합병 된 다음해인 1911년 6월 2일 세브란스병원 의학교를 졸업(제2회)해 의술개업인허장(제92호)을 받았다.

1911년 말 일제가 애국지사들을 대량 검거하기 위해 이른바 105인 사건을 조작하자 김필순은 체포 위기에 빠진 이태준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할 것을 모의했다.

중국 남경에서 의술 펼치던 이태준... 김규식의 권유로 몽골 울란바토르로 옮겨


이태준은 중국 남경의 '기독회의원'에서 의술을 펼치다 처사촌인 김규식의 권유로 몽골 울란바토르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까우리(高麗) 의사 이태준은 '동의의국'이라는 병원을 개설해 성병퇴치에 앞장섰다. 몽골사람들은 그를 신인(神人) 혹은 '극락에서 강림한 여래불(如來佛)' 대하듯 했다고 한다.

 울란바토르에 있는 간등사원 모습. 몽골이 러시아 지배를 받던 1930년경 스탈린의 종교탄압정책으로 800여개 사원이 무참히 파괴된 가운데서도 살아남은 몇 안되는 불교사원이다.
울란바토르에 있는 간등사원 모습. 몽골이 러시아 지배를 받던 1930년경 스탈린의 종교탄압정책으로 800여개 사원이 무참히 파괴된 가운데서도 살아남은 몇 안되는 불교사원이다. 오문수

 울란바토르 시내 야경 모습
울란바토르 시내 야경 모습오문수

 몽골인구 절반이  사는 울란바토르 시내 모습. 도로를 다니는 중고버스 거의 대부분은 한국산이었지만 승용차 대부분이 일본산이었다.
몽골인구 절반이 사는 울란바토르 시내 모습. 도로를 다니는 중고버스 거의 대부분은 한국산이었지만 승용차 대부분이 일본산이었다.오문수

몽골의 마지막 왕인 보그드칸 8세의 어의가 된 그는 1919년 7월 '에르데닌 오치르'라는 높은 등급의 훈장을 받았다. 몽골사회에서 두터운 신뢰를 쌓은 이태준은 각지의 애국지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비밀항일 운동에 커다란 공적을 쌓았다.


코민테른 자금 40만 루불 상당의 금괴 운송에 깊이 관여하기도 했다. 또한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에 가입해 우수한 폭탄제조자인 마쟈르를 소개시킴으로써 보다 체계적인 항일운동을 이끄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이태준의 비극적 최후
 이태준 선생 묘비 앞에서 묵념하는 일행들
이태준 선생 묘비 앞에서 묵념하는 일행들오문수

1921년 2월 러시아에서 잔인하기로 악명높은 운게른이 몽골을 점령했다. 이태준은 가오시린 중국군 사령관의 함께 탈출하자는 제의를 거부했다. 코민테른의 자금을 상해로 운반하고 우수한 폭탄 제조자인 마쟈르를 소개시킬 임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운게른 부하들은 이태준과 함께 많은 외국인들을 처형했다. 당시 이태준 나이 38세 꽃다운 나이였다. 한국과 몽골은 1990년 3월 외교관계를 수립했으며 1991년 10월 오치르바트 대통령의 방한을 시작으로 1999년 5월 김대중 대통령의 방문 등 정상간 교류가 이어졌다. 한국정부에서는 1990년 이태준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몽골정부에서는 울란바토르 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역에 땅 2천평을 내놓았다. 자이승 전승탑 근처에 위치한 이곳에는 많은 한국관광객들이 방문하는 명소다.

이태준 기념관을 찾는 관광객들을 위해 마련된 주차장 인근에는 커다란 부처상이 있다. 한국불교계에서 기증한 부처상 인근에는 조그만 사당이 두 개 있었는데 사라져 버리고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다.
 이태준 기념관 옆 주차장 인근에는 한국불교계에서 지어준 사원과 불상이 있다. 조그만 사원이 있었던 자리에는 고층아파트가 올라가고 있었다. 머지않아 불상도 밀려날 것 같다는 얘기에 "돈의 힘에 종교도 밀리는 구나!" 라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이태준 기념관 옆 주차장 인근에는 한국불교계에서 지어준 사원과 불상이 있다. 조그만 사원이 있었던 자리에는 고층아파트가 올라가고 있었다. 머지않아 불상도 밀려날 것 같다는 얘기에 "돈의 힘에 종교도 밀리는 구나!" 라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오문수

4년 전 이곳을 방문했을 때 사당을 보았던 몽골알타이 답사단 안동립 대장은 "저 부처상도 곧 헐리겠는데요"라며 안타까워했다. 이곳이 울란바토르에서 가장 좋은 주거지일 뿐만 아니라 땅값이 비싸기 때문이다. 퍼뜩 떠오른 생각 하나다. 돈의 힘에 부처님도 밀려나는구나! 
덧붙이는 글 여수넷통뉴스에도 송고합니다
#이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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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인권, 여행에 관심이 많다. 가진자들의 횡포에 놀랐을까? 인권을 무시하는 자들을 보면 속이 뒤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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