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농단의 또다른 피해자, 노회찬

[노회찬을 기리며] '삼성 X파일 사건' 유죄 판결에서 시작된 부정의

등록 2018.07.24 14:35수정 2018.07.25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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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노회찬 정의당 의원은 2013년 2월, 19대 국회에 입성한 지 열 달 만에 의원직을 잃었다. 2004년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로 17대 국회에 입성한 이듬해에 이른바 '안기부 X파일'(삼성 X파일)에 담긴 떡값 검사들의 이름을 공개했기 때문이다. 항소심에선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대법원은 부분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2013년 2월 의원직을 잃은 뒤 2016년 4월 20대 총선으로 국회로 되돌아오기까지 3년간 그는 두 번의 선거를 더 치렀다. 지역구였던 노원병에 그의 배우자 김지선씨가 출마했다가 안철수 후보에게 졌고, 2014년 동작을 재보궐선거엔 그가 직접 출마했다가 나경원 후보에게 밀렸다.

만약, 그가 무죄 판결을 받았으면 어땠을까. 의원직을 잃지 않고 20대 총선을 맞이할 수 있었다면, 그리하여 3년간 두 번의 선거를 더 치르지 않아도 됐다면, 그는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박근혜 정부 시절의 사법농단 의혹이 드러난 오늘이어서, 그 판결이 더더욱 아쉽다.

그가 국회를 떠나기까지 8년간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2013년 2월 14일, 그가 국회를 떠나며 남긴 성명으로 사건을 되짚어봤다.

국회에 들어간 지 1년 만에 의원직을 걸다

'의원직 상실' 회견장 떠나는 노회찬 2013년 2월 14일, 이른바 '떡값 검사' 실명 공개로 기소돼 대법원 판결로 의원직을 상실한 노회찬 진보정의당 공동대표가 대법원 판결에 대한 입장을 밝힌 뒤 착잡한 표정으로 회견장을 나서고 있다.
'의원직 상실' 회견장 떠나는 노회찬2013년 2월 14일, 이른바 '떡값 검사' 실명 공개로 기소돼 대법원 판결로 의원직을 상실한 노회찬 진보정의당 공동대표가 대법원 판결에 대한 입장을 밝힌 뒤 착잡한 표정으로 회견장을 나서고 있다.남소연

"199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국내 최대 재벌그룹 회장의 지시로 그룹 부회장과 유력 일간지 회장 등이 주요 대선후보, 정치인, 검찰 고위인사들에게 불법으로 뇌물을 전달하는 모의를 하고 이를 실행하는 과정을 담은 녹취록이 8년 후인 2005년 공개되었습니다. 이른바 안기부 X파일사건입니다." - 2013년 2월 14일 노회찬 진보정의당 공동대표 성명

2005년 8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회의에서 노회찬 의원은 안기부 X파일에 이름이 올라있던 김상희 당시 법무부 차관을 앞에 두고 '안기부 X파일'에 담긴 대화를 그대로 읽었다.


홍석현(1997년 당시 <중앙일보> 사장) : "아, 그리고 추석에는 뭐 좀 인사들 하세요?"
이학수(1997년 당시 삼성그룹 비서실장) : "할 만한 데는 해야죠."
홍석현 : "검찰은 내가 좀 하고 싶어요. K1들도. 검사 안 하는 데는 합니까?"
이학수 : "아마 중복되는 사람들도 있을 거에요. 예산을 세워주시면 보내드릴께요."
홍석현 : "OO한테 한 2천 정도 줘서 아주 주니어들, (이건희) 회장께서 전에 지시한 거니까. 작년에 3천 했는데, 올해는 2천만 하죠. 우리 이름 모르는 애들 좀 주라고 하고."

이어 노회찬 의원은 당시 김상희 차관에게 "적지 않은 액수인데 이거 받았는지 여기서 밝혀달라"고 요구한다. 김 차관은 "우선... 제가... 어... 그... 모든 것을... 하여튼... 저..." 하며 한참을 더듬거리다가 "저의 이름을 거명한 것으로 돼 있는 홍석현 전 <중앙일보> 회장과 저와의 관계를 말씀을 드리면, 우리 집안에 할아버지가 세 분이 계십니다"라며 가족관계를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노 의원은 "제가 지금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를 물은 것이고, 집안 사정을 물은 게 아닙니다"라며 말을 잘랐다.


"당시 법무부장관은 이 사건을 건국 이래 최대의 정, 경, 검, 언 유착사건이라 말한 바 있습니다. 주요 관련자인 (홍석현) 주미한국대사와 (김상희) 법무부 차관이 즉각 사임하였습니다. 그러나 뇌물을 준 사람, 뇌물을 받은 사람, 그 누구도 기소되거나 처벌 받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를 보도한 기자 두 사람과 국회 법사위 회의에서 떡값검사 실명을 거론하며 검찰수사를 촉구한 국회의원 한 사람이 기소되었습니다." - 2013년 2월 14일 노회찬 진보정의당 공동대표 성명

2005년 7월 25일, 삼성그룹은 임직원 명의로 사과문을 발표했다.

"국민 여러분께 걱정을 끼쳐 드린 점, 죄송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저희 삼성은 우리 경제의 재도약과 국제경쟁력 강화에 더욱 힘을 쏟겠습니다."

떡값 검사들의 고소... 검찰과 사법부의 부정의한 공조

 2005년 12월 14일, 검찰이 삼성 X파일 사건과 관련해 이건희 회장과 홍석현 전 주미대사, 이학수 구조본부장에 대해 불기소 결정을 내린데 대해 민주노동당과 전국언론노동조합이 공동으로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항의집회를 열고 있는 모습.
2005년 12월 14일, 검찰이 삼성 X파일 사건과 관련해 이건희 회장과 홍석현 전 주미대사, 이학수 구조본부장에 대해 불기소 결정을 내린데 대해 민주노동당과 전국언론노동조합이 공동으로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항의집회를 열고 있는 모습. 오마이뉴스 남소연

그러나 다음 달 떡값검사 명단에 이름이 올라있던 7명 중 2명이 노회찬 의원을 '명예훼손 및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협의로 민·형사 고소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서울중앙지검은 '삼성 X파일 사건'에 대한 수사결과를 발표한다. 홍석현과 이학수는 '혐의 없음', 검사들과 이건희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조사조차 진행하지 않은 채 불기소 처분이 내려졌다.

그리고 얼마 뒤 <중앙일보>는 당시 이 수사를 지휘한 황교안 서울중앙지검 2차장검사를 '2005 새뚝이'로 선정했다. '새뚝이'는 '기존의 장벽을 허물고 새 장을 여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중앙일보>는 새뚝이가 희망을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중앙일보>가 밝힌 선정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인권 침해 시비나 수사기밀의 외부 유출 등 작은 실수 없이 수사를 말끔하게 마무리했다."

이제 남은 건 노회찬 의원에 대한 민·형사 고소 사건에 대한 재판. 2009년 2월 1심 재판부는 노회찬 의원에게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 자격정지 1년의 유죄를 선고했다. 같은 해 12월, 항소심 재판부는 무죄를 선고했으나 2년 뒤인 2011년 5월 대법원은 부분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홈페이지 게재에 의한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부분은 위법"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2013년 2월 14일, 고등법원을 거쳐 다시 대법원이 징역 4월에 집행유예 1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로써 노 의원은 19대 국회에 입성한 지 10개월 만에 의원직을 잃었다. 하루 전인 2013년 2월 13일, 노 의원의 고교동창이기도 한 황교안 검사는 박근혜 정부의 법무부장관 후보로 지명됐다.

"다시 8년이 지난 오늘 대법원은 이 사건으로 저에게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의 죄목으로 유죄를 확정하였습니다. 뇌물을 줄 것을 지시한 재벌그룹 회장, 뇌물수수를 모의한 간부들, 뇌물을 전달한 사람, 뇌물을 받은 떡값 검사들이 모두 억울한 피해자이고, 이들에 대한 수사를 촉구한 저는 의원직을 상실할 만한 죄를 저지른 가해자라는 판결입니다. 폐암환자를 수술한다더니 암 걸린 폐는 그냥 두고 멀쩡한 위를 들어낸 의료사고와 무엇이 다릅니까?

국내 최대의 재벌 회장이 대선후보에게 거액의 불법 정치자금을 건넨 사건이 '공공의 비상한 관심사'가 아니라는 대법원의 해괴망칙한 판단을 저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국민 누구나가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1인 미디어 시대에 보도자료를 언론사에 배포하면 면책특권이 적용되고 인터넷을 통해 일반 국민에게 공개하면 의원직 박탈이라는, 시대착오적 궤변으로 대법원은 과연 누구의 이익을 보호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저는 묻습니다. 지금 한국의 사법부에 정의가 있는가? 양심이 있는가? 사법부는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 2013년 2월 14일 노회찬 진보정의당 공동대표 성명

대법원의 판결에 대해 당시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조국 교수는 이렇게 꼬집었다.

"국회의원의 면책특권을 협소하게 파악해 국민의 대표기관 의정활동을 제약했다. 법원은 마땅히 공소기각의 판결을 내렸어야 했다. 게다가 형법 제20조 정당(正當) 행위에 해당해 위법성이 조각(배제) 돼야 한다."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의 판결

"저는 오늘 대법원의 판결로 10개월 만에 국회의원직을 내려놓고 다시 광야에 서게 되었습니다. 안기부 X파일사건으로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서도 뜨거운 지지로 당선시켜주신 노원구 상계동 유권자들께 죄송하고 또 죄송할 뿐입니다.

그러나 8년 전 그날, 그 순간이 다시 온다하더라도 저는 똑같이 행동할 것입니다. 국민들이 저를 국회의원으로 선출한 것은 바로 그런 거대권력의 비리와 맞서 싸워서 이 땅의 정의를 바로 세우라는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대법원 판결은 최종심이 아닙니다. 국민의 심판, 역사의 판결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오늘 대법원은 저에게 유죄를 선고하였지만 국민의 심판대 앞에선 대법원이 뇌물을 주고받은 자들과 함께 피고석에 서게 될 것입니다. 법 앞에 만 명만 평등한 오늘의 사법부에 정의가 바로 설 때 한국의 민주주의도 비로소 완성될 것입니다. 그 날을 앞당기기 위해 오늘 국회를 떠납니다. 다시 국민 속으로 들어가겠습니다." - 2013년 2월 14일 노회찬 진보정의당 공동대표 성명


'국회를 떠나며'라는 제목이 붙은 이 성명이 발표된 이후,각계각층에서 그를 응원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의원직을 걸고 삼성독재와 싸운 국회의원은 단 한 명 노회찬뿐이었다. 오늘 대한민국 국회는 죽었다" - 노 의원과 함께 기소되었던 이상호 기자
"대법원이 정의를 버리고 돈과 권력의 손을 잡았다. 언젠가 국민이 그를 구해줄 것이라 믿는다." - 유시민 작가
"시대의 짐을 진 그에게 모두가 깊은 부채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 조희연 당시 성공회대 교수


 2005년 9월 8일,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이 국회에서 열린 이용훈 대법원장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질의하고 있는 모습.
2005년 9월 8일,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이 국회에서 열린 이용훈 대법원장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질의하고 있는 모습. 오마이뉴스 이종호

마지막으로 2005년 9월, 이용훈 대법원장 인사청문회 자리에서 노 의원과 이용훈 후보가 주고받은 대화를 소개한다.

노회찬 의원 : "우리나라에서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용훈 후보 : "(망설이다) 법은 그렇게 돼 있죠."
노회찬 의원 : "판결문에 보면, 양형과 관련해서 이런 것들이 나옵니다. '전문 경영인으로서 한 직장에서 수십 년 동안 성실하게 재직해온 것을 감안하여'... (중략) 대한민국 판결문 중에 '피고인은 지난 수십년간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감수하면서 산업재해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동안 산업현장에서 노동자로 일해 온 점을 감안하여', 뭐 이런 구절이 들어가 있는 걸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용훈 후보 : "글쎄요... 아직... 아..."


우리를 대신해 이런 말을 해줄 정치인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시대의 짐을 진 그에게 모두가 깊은 부채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라는 말이 내내 머리를 맴돈다. 부디 영면하시길 빈다.
#노회찬 #사법농단 #안기부X파일 #떡값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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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옆 앞 '기찻길옆골목책방' 책방지기.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수도권에서 살다가 2022년 전북 익산으로 이사해 지방 소멸의 해법을 찾고 있다. <로컬 혁명>(2023), <로컬꽃이 피었습니다>(2021), <슬기로운 뉴 로컬 생활>(2020), <줄리엣과 도시 광부는 어떻게 마을과 사회를 바꿀까>(2019), <나는 시민기자다>(2013) 등을 썼다.

오마이뉴스 전국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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