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26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의 빈소에서 정의당 당직자들이 창원으로 노 의원의 영정을 옮길 준비를 하고 있다.
이희훈
노회찬은 누구인가. 도올 김용옥 선생은 사람을 사랑하고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섰던 '이 시대 예수와 같은 사람'이라고 애도했다. 실제 그가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즐겨 썼던 촌철살인의 비유적 표현은 '민중의 언어'였다. 작가 안재성은 진보정치인 노회찬을 1950년대 진보당 '조봉암 선생을 닮은 정치인'으로 묘사했다. 북유럽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하며 수탈적 경제 현실 속에서 대중을 위한 정치에 온 힘을 쏟았다는 공통점 때문이리라.
1987년 6월 항쟁 이후 '인천지역 민주노동자연맹'(약칭 인민노련)은 노회찬 등을 중심으로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꿈꾼다.1990년대를 관통해 민중당-진정추(진보정당 추진위원회 약칭)-국민승리21-민주노동당의 창당에는 항상 노회찬이 있었다. 당시 운동권 양대 진영인 NL(민족해방계)과 PD(민중민주주의계) 가운데 선거와 정당 운영 경험이 많았던 쪽은 대체로 PD계열이었다.
PD계열 노동운동가 노회찬은 199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진보정당 건설의 핵심적 인사였다. 그는 2000년 진보정당 민주노동당이 창당한다. 그리고 4년 뒤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무려 국회의원 10명을 배출한다. 진보정치인이 의회로 진출하는 역사적 순간이 열린 것이다. 1961년 혁신계 진보정당 의원들이 박정희 쿠데타로 무너진 지 무려 43년 만에 이 땅에 진보정치의 싹을 틔워 부활한 것이다.
노회찬은 국회의원 배지를 달자마자 맨 먼저 '호주제'로 차별받아온 여성들을 위해 민법 개정을 시도했다. '호주제 폐지'를 2004년 입법 발의했다. 노회찬은 2004년 국회의원이 되자마자 가장 먼저 차별받는 여성의 고통에 주목했고 여성단체의 호주제 폐지 운동에 힘을 실었다. 이뿐만 아니다. '장애인 차별금지법'(2005), 그리고 '차별금지법'(2008)을 맨 처음 국회에서 대표 입법 발의한 정치인이 노회찬이다. 또 노회찬은 국회 상임위에서 삼성 X파일 사건을 터트리기도 했다. 대통령을 넘어서는 무소불위의 권력, 삼성에 맞서 치부를 드러내고 떡값을 받았던 삼성 장학생 7명의 검사 실명을 공개했다. 삼성 X파일 사건은 진보정치인 노회찬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인민노련 출신 노회찬에 대한 기억들 이렇게 활약하던 그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받은 4000여만 원을 법대로 후원금 처리하지 못했다고 밝히며 지난 7월 23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노회찬의 충격적인 죽음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한스럽고 안타깝다. 처벌받고 사죄해야 할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그가 갑작스레 이별을 고했다. 가까스로 진보의 씨앗이 싹을 터 꿈나무로 성장하려던 순간에 찾아온 비극이었다. 그날 오전에 접한 갑작스런 비보에 수많은 사람들이 충격에 빠졌고 비통해했다.
1980년대 후반 인민노련에서 노회찬과 함께 활동했던 어느 친구는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충격으로 공황 상태가 돼버린 그 친구의 붉은 두 눈은 슬픔으로 가득했다. 오전에 소식을 듣고 황급히 투신한 아파트로, 그리고 신촌 세브란스 장례식장으로 달려왔을 텐데 점심도 거르고 저녁도 사양했다. 먹을 수가 없었나 보다. 밥을 국에 말아 몇 숟갈 뜨라고 억지로 권해도 슬픔의 충격을 이기질 못했다.
그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이다. 학생운동 출신들은 노동 현장에서 고생했더라도 그나마 나중에 생계를 이어간다. 그러나 노동자 출신들은 노동 운동하다가 감옥에 가고 블랙리스트에 오르면 먹고 살길이 막막하다. 사회적 무관심과 빈곤 속에 어느 날 가족이 해체되고 병고에 시달린다. 그러다 노동자 출신들은 암 투병으로 원망 속에 고통받다 죽어갔다고 했다.
그런 소식을 듣고 진보정치인 노회찬은 2011년 경 십시일반 모금한 돈 3000만 원을 들고 투병 중인 노동자 출신 옛 동지를 병문안 간 적이 있다. 병상에서 말기 암 환자가 되어 투병 중이던 인민노련 옛 동지 영창악기 노조위원장 A씨를 찾아간 것이다. 둘은 한참을 부둥켜안고 서로 눈물로 위로했다. 당시 노회찬은 18대 총선조차 낙선한 원외 정치인이었다. 옛 동지가 투병으로 고통받고 있을 때 그렇게 따뜻했던 사람이 진보정치인 노회찬이었다. 그런데 왜 그리도 황망히 떠나갔을까?
언젠가 노회찬은 이렇게 고백했다. '인민노련은 나의 정치적 고향'이라고. 그런 의미에서 1990년대 진보정당사의 골간이자 뿌리는 인민노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이루어갈 때, 1990년대를 거치면서 과거의 인민노련 동지들이 하나둘 운동에서 이탈해 떠나갔다. 그 빈 자리를 노회찬이 메워나갔다.
인민노련 옛 동지들은 노회찬을 단단했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낙천적이었고 두터운 현실의 벽 앞에서도 낙관주의적 자세를 잃지 않았다. 그리고 온화한 웃음과 유머 또한 잃지 않았다. 1980년대 인민노련에서 그리고 1990년대 민중당-진정추에서 함께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꿈꾸었던 그 친구는 지난 7월 26일 연세대 강당에서 열린 추도사에서 인민노련을 대표해 이렇게 노회찬을 회상했다.
"노회찬은 강철이고
노회찬은 철벽이고
노회찬은 바위 같은 분이라고
혼자서도 다 헤치고 가실 줄만 알았습니다.
이렇게 가실 줄이야 어떻게 상상이나 했겠습니까"그가 사라지고 나서야 빈자리를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