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사 좌상 바라보는 증손자 토니 안씨제73주년 광복절 및 정부수립 70주년을 맞아 방한한 안중근 의사의 증손자 토니 안씨가 14일 오후 서울 중구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안중근의사 대형 좌상을 바라보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안중근 의사의 유해 발굴사업을 남북 공동으로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지난 14일 청와대에서 생존 애국지사 13분, 독립유공자 후손 220분과 함께 오찬을 하는 자리에서 그렇게 밝혔다. 이 자리에는 안 의사의 증손인 토니 안 씨와 외증손인 이명철씨도 함께했다.
안중근 의사는 대한제국 멸망 5개월 전인 1910년 3월 26일 서거했다. 올해로 서거 108주년을 맞는다. 그런데 아직 그의 유해를 인수하지 못했다. 결정적 이유는 그의 시신에 대한 일본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안중근의 시신에 적용되는 일본 법률은 1908년 10월 1일부터 시행된 감옥법이었다. 이 법 제74조는 '사체·유골의 교부'(死体·遺骨の交付)라는 제목 하에 이렇게 규정했다.
"사망자의 친족이나 친구로서 사체 또는 유골을 요청하는 자가 있으면 언제라도 교부할 수 있다. 단, 합장된 후에는 이런 제한을 받지 않는다(死亡者ノ親族故旧ニシテ死体又ハ遺骨ヲ請フ者アルトキハ何時ニテモ之ヲ交付スルコトヲ得. 但合葬後ハ此限ニ在ラス.)."
사형수의 친족이나 친구가 사체 또는 유골을 요청하면 언제든 교부할 수 있다고 정했다. 친족과 달리 친구의 범위는 명확하지 않다. 그런데도 친구한테 내줄 수 있도록 한 것은, 시신·유골을 국가가 갖고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누구든지 연고권만 주장하면 내주겠다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단, 예외가 있었다. 교부 요청이 있기 전에 다른 시신과 합장된 경우에는 시신 교부를 거부할 수 있었다.
그런데 '교부할 수 있다'고 했다. 이 말은 '교부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잘못 이해될 수도 있지만, 그런 의미는 아니다. 문법상으로는 그렇게 될 수도 있지만, 법조문에는 법조문 나름의 문법이 있다.
제74조의 기본 원칙은 '언제라도 교부할 수 있다'는 부분이다. 단서의 예외조항이 적용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언제든지 교부하는 게 원칙이었다. 이 원칙을 어기고 교부를 거부하려면 합당한 명분이 있어야 했다. 명분이 없으면 교부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냥 '교부한다'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교부할 수 있다'라고 한 이유는 뭘까? 이것은 바로 앞의 '언제라도(何時ニテモ)'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 사형 집행일로부터 오랜 시일이 경과한 뒤에도 친족·친구가 언제든 요청할 수 있고 교정 당국 역시 언제든 내줘야 한다는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
시신 교부했어야 하는 일본,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안중근에 대한 사형 집행 뒤에 교정당국은 당연히 시신을 교부했어야 한다. 단서 조항에 걸릴 만한 사유도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래야 했다. 더군다나 사형 집행 전부터 시신 인수를 준비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마땅히 내줄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시신을 인수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사형집행 전부터 알고 있었다. 조선통감부(조선총독부의 전신)의 내부보고서에는 "살인 피고인 안중근에 대한 사형은 26일 오전 10시 감옥서 내의 형장에서 집행되었다"라고 한 뒤 아래와 같이 말한다. 이 보고서는 국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 <한국독립운동사자료> 7권에도 실려 있다.
"이(사형집행)보다 앞서, 안(安)의 두 동생이 오늘 사형이 집행된다는 말을 전해 듣고 그 사체를 인수해 곧장 귀국하려고 여장을 갖춘 뒤 감옥서에 출두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보고를 접하였다. 그래서 급히 수배해서 그들의 외출을 금지했다."
일본은 안정근·안공근이 형의 시신을 인수하려고 뤼순의 숙소에서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그래서 이들의 외출을 미리 차단했다. 일본이 이렇게까지 민감한 반응을 보인 이유에 관해 신운용 안중근연구소 책임연구원의 '안중근 유해의 조사·발굴 현황과 전망'은 이렇게 말한다.
"안중근의 죽음은 일제에 또 다른 의미의 두려움이었다. 일제는 안중근의 주검으로 초래될 후폭풍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2010년 발행된 <역사문화연구> 제36집에 실린 논문.
당시는 조선이 일본에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안중근 시신이 조선인들에게 넘어가면 항일운동의 상징물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게 일본의 판단이었다. 위 논문에 인용된 일본 외무성 내부 문서에 따르면, 일본은 시신 처리 문제와 관련해 "장래를 위해 좋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므로 마땅히 주의해야 한다"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일본의 두려움은 사형 집행일을 변경한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원래 집행일은 3월 25일이었다. 그런데도 다음날 집행한 것은 현직 군주인 순종 황제의 양력 생일과 겹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순종은 음력으로 고종 11년 2월 8일, 양력으로 1874년 3월 25일 출생했다.
황제의 양력 생일에 사형을 집행할 경우의 위험성에 대해 1910년 3월 22일자 통감부 내부의 보고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 보고서는 <한국독립운동사자료> 제7권에도 수록돼 있다.
"다가오는 25일에 안(安)의 사형이 집행될 예정이라는 전보를 받았다. 그 날은 한국 황제 탄생일에 해당돼 한국 인심에 악감정을 줄 우려가 있어 관동도독부에 신청한 결과, 이 도독부에서 3월 26일 사형을 집행하고 유해는 뤼순에 매장할 예정이라는 회답을 보내왔다."
황제 생일에 안중근을 처형하면 한국 민심이 위험해진다고 판단했다. 이런 이유에서 집행일을 연기한 일본은 3월 26일 당일에도 시신 문제에 만전을 기했다.
일본은 안중근 동생들이 시신 인수를 요청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두 동생을 사형 집행 시각까지 숙소에 묶어둔 데 이어, 집행이 끝난 뒤에 이들을 감옥으로 불러 시신 불인도 처분을 통지했다. 감옥법에 따르면 원칙상 교부해야 하지만, 안중근 시신이 항일투쟁에 이용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법률을 어기면서까지 시신을 감옥 안에 매장했다.
그러자 두 동생은 대성통곡하면서 시신 인도를 요구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일본 경찰들은 두 형제를 강제로 끌어낸 뒤 기차역으로 데려갔다. 그렇게, 두 동생은 강제로 귀국됐다. 이로써 유족이 시신을 인수할 기회는 사실상 사라지고 말았다. 이로부터 지금까지 108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10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