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만에 퇴직했다,
출근 안 하는 첫 월요일 아침 이 글을 쓴다

[어느 베이비 부머 세대의 퇴직] 가장 큰 차이, 하루 스케줄을 누가 결정하는가

등록 2018.08.20 07:53수정 2018.08.20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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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어려운 바위 벼랑과 비바람 맞을지라도
더 안 보이는 안개에 묻힐지라도
우리가 어찌 우리를 그만둘 수 있겠는가
우리 앞이 모두 길인 것을...


이성부 시집 <우리 앞이 모두 길이다> 중에서


드디어 퇴직했다. 30년의 직장생활을 마감하고 자유인으로 돌아왔다. 남들은 다 출근해 일하는 월요일 아침, 나 홀로 집을 지키며 이 글을 쓴다.

직장에 다니는 동안 수없이 상상했다. 퇴직하고 출근하지 않는 첫날 아침 기분은 어떨까 하고.

상상만 하던 일을 막상 겪고 있는 월요일 아침. 내 마음은 홀가분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다. 때로는 감옥에서 풀려난 것과 같이 자유롭고 때로는 뭔가 중요한 자리에서 밀려난 느낌도 든다. 한동안은 두 감정이 오가리라 생각한다. 내 인생에서 처음 만나는 낯선 시간에 적응하는 데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

모두 출근했을 그 시각에


 누군가는 내가 해왔던 일을 하느라 분주하겠지.
누군가는 내가 해왔던 일을 하느라 분주하겠지. pexels

월요일 아침, 새벽 5시 반에 일어났다. 우유 한 잔 마시고 새벽 6시에 아내와 같이 운동(달리기)을 하고 씻고, 밥을 먹었다. 아내는 출근, 나는 노트북으로 글을 쓰고 있다. 지금쯤 직장에서는 다들 출근해 커피를 마시고, 날씨 이야기를 하면서 일과를 시작하고 있으리라. 시원한 에어컨이 켜진 사무실에서 각자의 책상에 앉아 오늘 할 일을 계획하고, 회의하고, 바쁘게 일주일의 첫날을 맞고 있을 게다. 내 자리에는 후임으로 온 직원이 윗사람의 지시를 받고 내가 해온 일들을 대신 하느라 분주하겠지.

지난주 금요일 오전, 업무 인수인계를 할 때 기분이 혼란스러웠다. 내가 원해서 자발적으로 하는 퇴직이건만, 뭔가 아쉽고 우울했다. 내가 일하던 자리에 누군가가 들어와서 대신 해도 아무런 티도 나지 않고 직장은 잘 굴러갈 것이다. 나의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고 나는 단지 조직의 하나의 부속품이어서 낡은 부속품을 새 걸로 교체하면 그만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쩌랴. 세월은 끊임없이 흐르고 나이 들면 걸맞은 자리에 있는 게 자연스럽고 정상일 것이다. 물러날 때 물러나지 않고, 욕심 부리고 자리 지키는 것은 얼마나 추한 일인가. 요즘 같은 세상에 30년 동안 무사히 직장생활을 하고, 자신의 의지로 퇴직하고, 다음 30년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는 것은, 어쩌면 행운이요 축복일 것이다. 얼마간은 불안하고 두렵지만 아기가 첫 발걸음을 두려움 속에서 내딛지만 곧 재미를 느끼고 걸음마를 하고 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인생 2막을 용기 있게 시작해야 한다.

퇴직과 비퇴직, 무엇이 다르냐면

 퇴직 전과 후,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
퇴직 전과 후,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 pexels

퇴직 이전과 이후의 삶에서 가장 큰 차이는 뭘까. 아마도 '하루의 스케줄을 누가 결정하는가'일 것이다. 직장에서는 누군가에 의해 정해진 하루 일정에 따라 일을 해야 한다. 출근 시간, 업무 시간, 점심시간, 퇴근 시간, 초과 업무 시간 등 모두 나 아닌 다른 누군가 결정해 놓은 걸 그대로 따라야 한다.

직장에서 가끔은 '시간의 노예'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하지만 퇴직 이후는 자신이 하루 스케줄을 짜야 한다. 무엇을 언제 어디서 하든 오로지 자신이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이 결정하고 자신이 지키는 것은 인간다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난 하루가 가장 중요한 시간의 단위라고 생각한다. 하루가 일주일, 한 달, 일 년, 한 평생의 기본이다. 따라서 하루를 가장 가치 있고 만족스럽게 보내면 성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퇴직 후의 하루 일과를 기상 오전 5시 30분, 운동 오전 6시~7시, 아침 식사 오전 7시 30분, 점심 낮 12시 30분, 저녁 오후 6시, 저녁 운동 오후 8시~9시, 취침 오후 10시로 계획했다.

잠자는 시간, 먹는 시간, 운동하는 시간을 고정하면 하루 리듬을 유지하고 일정한 생활 패턴으로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외 시간은 당분간 비워 놓고서 천천히 내가 진정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채워 넣을 생각이다.

퇴직 후 삶에서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일 것이다. 직장 생활을 할 때 심한 스트레스, 부주의한 식사, 운동 부족으로 체력이 너무 약해진 것을 많이 느꼈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너무 피곤해 운동은 생각도 못 했다. 저녁 먹고 텔레비전을 보다가 잠드는 일상의 연속이었다.

그 결과 수시로 설사를 하고, 불면증을 겪고, 우울한 기분으로 생활한 날들이 많았다. 이제는 먹는 것에 신경을 쓰고 규칙적으로 운동해 체력을 끌어올리는 게 가장 급한 일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생각한 것은 아침 저녁 달리기다. 처음에는 5분도 뛰지 못하고 헉헉 거렸다. 하지만 아침 저녁으로 꾸준히 달리기를 하니 이젠 15분 정도는 달릴 수 있다.

이제는 달릴 수 있다

나는 달린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달리기는 나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
나는 달린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달리기는 나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이영식

매일 열심히 조금씩 시간과 거리를 늘려 달리다 보면 언젠가는 마라톤 풀코스도 가능할 것이다. 문제는 매일 할 수 있느냐. 누군가가 말했다. 노력이란 말은 자신의 의지로 하루도 빼먹지 않고 일정 시간을 어떤 일에 투자하는 것을 뜻한다고. 이제는 나의 의지로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마라톤으로 체력을 키운 후 목표는 네팔에 가는 것이다. 나는 30대 무렵부터 대한민국의 수많은 남자들처럼 등산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전국의 여러 명산들을 사람들과 어울려 등산하는 것을 즐기곤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산도 정상 정복이 아닌 둘레길을 한두 시간 걷는 것으로 바뀌고 말았다.

하지만 늘 마음속에는 퇴직하고 자유로우면 히말라야를 걷는 꿈을 꾸며 살아왔다. 퇴직하면 맨 먼저 히말라야에 가서 설산을 걸으며 나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반추해 보고 앞으로의 삶을 계획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네팔 트래킹에 관한 책들을 빌려 읽곤 했다.

그러던 중 이번에 김동규씨가 쓴 책 <히말라야를 걷는다>를 읽으며, 나의 네팔 트래킹에 대한 생각을 구체화 하고 있다. 김동규씨는 퇴직 후에 달랑 배낭하나 짊어지고 90일 동안 안나푸르나, 무스탕, 에베레스트를 트래킹했다. 나도 그가 걸은 길을 따라서 걷고 싶은 마음으로 준비를 하고 있다. 9월까지 열심히 운동을 하여 체력을 기른 후에 10월에는 네팔에 가서 12월까지 네팔을 두루 두 발로 걸어보는 꿈을 꾼다. 3개월 정도 혼자서 설산을 바라보며 자신의 본 모습과 마주하고 대화하다 보면 진정 내가 원하는 것, 하고 싶은 일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 나는 자유롭다. 먹고, 뛰고, 자는 것만이 내가 하루 중 해야 하는 일이다. 그 외에는 책을 읽고 싶으면 읽고, 음악을 듣고 싶으면 듣고 싫으면 만다. 모든 것에서 자유롭다.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고 하늘에서 떠도는 구름처럼 자유로움을 느낀다. 이런 나를 보며 아르바이트 하러 나가는 딸이 자기도 퇴직하고 싶다고, 퇴직시켜 달라고 조른다. 나는 호기롭게 말한다.

"그래 하고 싶으면 너도 퇴직해라, 30년 뒤에."

"학문을 하는 길은 날로 더해가는 것이나 도를 깨달아 가는 길은 날로 덜어내는 것이다."(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 - 노자 도덕경 48장
#퇴직 #은퇴 #제 2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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