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 의혹' 안희정 전 도지사, 고개 숙여 사과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지난 3월 서울서부지방검찰청에서 재조사에 앞서 국민들에게 사과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유성호
성범죄에서 '좋은 가해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법원이 보기에 '좋은 피해자'는 존재하는 모양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가해자 처소에 제 발로 가지 말아야 하고, 상황이 어떠하든 가해자에게 저항해야 하며, 사건 이후에는 누가 봐도 알 수 있게끔 외면적으로 고통을 드러내야 할 뿐 아니라, 정상적 생활을 영위하지 못할 정도로 삶이 망가져야 하지만 사건의 진술만큼은 어긋남 없이 정확해야 한다.
만일 이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그 피해자는 법의 보호를 받을 가치가 없거나, 애초부터 피해자가 아니게 된다. 특이하게도, 한국의 검찰과 법원은 성범죄를 다룰 때 '가해자가 무엇을 했는가'보다 '피해자가 무엇을 안 했는가'에 초점을 둔다. 그 결과에 따라 '좋은 피해자'와 '나쁜 피해자가' 가려지고, 이 판단은 가해자의 유죄와 무죄를 가르는 결정적 기준이 된다.
서울서부지법 형사합의11부(부장판사 조병구) 눈에 안희정 사건 생존자는 '좋은 피해자'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예컨대 그녀는 피고인의 지시를 거부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그에게 갔으며, "문을 열고 나가는 등으로 최소한의 회피와 저항을 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임에도, 피해자의 그러한 언행은 없었"고, 사건 이후에는 "피고인이 좋아하는 순두부를 하는 식당을 찾아 아침식사를 하려" 애쓰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재판부는 이에 대해 "피고인을 처벌할 수 있는 사건이라고 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놀라운 것은, 이 선고문의 결론 앞에 등장하는 문장이다. "(피해자가)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거절하는 태도를 보인 바 있었으며, 피해자의 진정한 내심에는 반하는 상황이었다고 하더라도, 현재 우리 성폭력 범죄의 처벌체계 하에서 이러한 사정만으로 피고인의 행위가 처벌의 대상이 되는 성폭력범죄라고 볼 수도 없다"는 것이다.
한국의 현행법은 명시적 동의가 없는 성행위를 강간으로 처벌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상대가 거부 의사를 표현하는 경우조차 폭행이나 협박이 없으면 강간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이 사건은 그와 같은 전제에서 피고인을 처벌할 수 있는 사건이라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정말 그럴까?
형법 제297조(강간)를 보면, 법적 한계로 처벌이 불가하다는 재판부 주장이 그럴듯하게 들릴지 모른다.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주장은 전제부터가 잘못되었다. 이 재판은 '강간' 사건에 대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안희정은 '강간'으로 기소되지 않았다
안희정이 기소된 혐의는 ①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 4건 ②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 1회 ③강제추행 5회다. 이 모든 혐의에 무죄가 선고됐다. 여기서 첫 번째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의 '간음'이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강간'과 달리 강제성이 배제된 언어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적용되는 법 조항도 강간과 다르다.
"제303조(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 업무, 고용 기타 관계로 인하여 자기의 보호 또는 감독을 받는 사람에 대하여 위계 또는 위력으로써 간음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선고문을 보면, 재판부는 다른 두 법 조항을 자의적으로 뒤섞어 놓았다.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은 '폭행'이나 '협박'을 요구하지 않는데도, '폭행,' '협박,' '강간' 등의 언어를 남발하고 있는 것이다. 재판부는 판결문 서두에서 '성폭력'과 '성폭행' 등의 개념이 혼란스럽게 쓰이는 현실을 지적한 뒤에도 이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선택을 했다.
이런 모순은 구체적 공소사실 판단에서 더 두드러진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피해자와 상당히 이야기를 나누어 교감을 형성한 다음 성관계에 이르렀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지만, 피해자는 달리 이야기하고 있다"고 언급한 뒤, 피고인의 손을 들어주는 결론을 내린다. 그 이유를 들어보자.
"피해자 주장에 따라 보더라도, 간음행위 전 단계에서 피고인이 행한 신체접촉이 맥주를 들고 있는 피해자를 포옹한 행위이고, 언어적으로는 외롭다고 안아달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행위 부분을 위력을 행사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지 의문이 있다."
상사가 부하직원을 일방적으로 안으며 '외로우니 안아달라'고 한 행동이 '위력을 행사한 게 아니'라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다. 게다가 이 행동을 이후 행해진 간음을 합리화하는 '교감 형성'의 증거처럼 제시하고 있다. 이는 '성인지 감수성'이 매우 낙후되어 있던 20년 전의 판결과 비교해도 '젠더 의식'은 물론, 법적용상 합리성까지 현저히 떨어지는 결론이 아닐 수 없다.
1997년 유치원 원장이 노래방과 자신의 아파트 등에서 교사를 성추행하고 성폭행을 시도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피고인 측은 노래방에서 가해자가 자리를 비운 뒤에도 피해자가 도망치지 않았고, 스스로 아파트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온 적도 있으며, 술과 안주 등을 사 오기도 했다는 이유 등을 들어 위력에 의한 성추행이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가해자 측은 이에 불복해 상고했으나 기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