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지방변호사회관에서 '고은 손해배상 청구소송 공동대응을 위한 기자회견'이 열렸다. ⓒ 한국여성단체연합
고은 시인에게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당한 최영미 시인과 그를 지원하는 여성 단체들이 "2차 가해를 멈추고 반성하라"고 고은 시인을 비판했다.
350여개의 여성노동시민사회단체가 연합한 '#미투운동과함께하는시민행동'은 23일 서울 서초동 서울지방변호사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고은 시인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규탄했다. 지난달 17일 고은 시인은 자신의 성폭력 의혹을 제기한 최영미·박진성 시인에게 각 1000만원, 해당 내용을 보도한 언론사와 기자 2명을 상대로 20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이날 최영미 시인은 "민족문학의 수장이라는 후광이 그의 오래된 범죄 행위를 가려왔다"며 "이 재판엔 제 개인의 명예만이 아니라 이 땅에 사는 여성들의 미래가 걸려 있으므로, 모든 것을 걸고 싸우겠다"고 밝혔다. 최 시인은 그러면서 "품위를 잃지 않고, 끝까지 평정심을 잃지 않고 싸워서 이기겠다"며 "이 재판은 그의 장례식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막상 범죄를 저지른 당사자들은 언제 누구에게, 어떤 성폭력을 행했는지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지적한 뒤 "고은 시인의 경우, 1993년 서울 탑골공원 근처 술자리에서 최영미 시인이 '최악의 추태, 내 입이 더러워질까 말하지 못한다'고 할 정도의 언행을 했다"고 밝혔다.
이 소장은 또 "또 다른 피해자들도 연이어 자신이 목격하거나 겪은 피해를 말하고 있다"며 "그가 국내외적으로 갖는 문화권력으로 인해 피해자들은 20여년이 훨씬 지나서야 이 사실을 알릴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날 최 시인의 소송대리인으로 참석한 조현욱 한국여성변호사회 회장은 "이 땅에 사는 모든 여성들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동등한 존재로서 서로 존중하며 대우받아야 한다"면서 "더 이상 예술성이라는 미명 하에 여성에 대한 성추행, 성희롱이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반드시 이 사건의 실체를 밝히고 치밀한 법리 전개를 통해 꼭 승소하겠다"고 다짐했다.
기자회견문을 낭독한 이재정 한국여성단체연합 활동가는 "고은 시인은 문제 제기 이후 오랜 시간 잠적하다 뒤늦게야 거액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며 "이러한 손배 소송은 미투 운동이 확산된 이후 일부 가해자들이 피해자들을 상대로 '무고죄' '명예훼손' 등 역고소를 감행한 것과 더불어 피해자와 증언자를 위축시키려는 '2차 피해'의 전형"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 '못참겠다. 박살내자'며 거리로 나왔던 2만 여명의 시민을 비롯한 많은 대중이 이번 재판 역시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고은은 자각해야 할 것"이라며 "고은에게 엄중히 경고한다. 더 이상 당신에게 남아 있는 명예는 없다. 바닥으로 떨어진 명예를 회복할 기회마저 본인 스스로 저버렸다"고 성토했다.
▲ 23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지방변호사회관에서 '고은 손해배상 청구소송 공동대응을 위한 기자회견'이 열렸다. ⓒ 한국여성단체연합
이재정 활동가는 "대중은 당신의 이러한 뻔뻔함에 더욱 큰 환멸감을 느끼고 실망할 뿐"이라며 "문학계 거장으로 군림하며 오랜 기간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 여성 문인들을 착취했던 당신의 과오는 절대 용납될 수 없으며, 고은은 당장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멈추고 철저히 반성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한편 지난달 17일 고은 시인은 자신의 성폭력 의혹을 제기한 최영미·박진성 시인과 언론사 및 기자 2명에게 20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이후 최 시인은 여성가족부와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의 도움을 받아 조현욱·차미경·안서연·서혜진·장윤미 변호사를 소송대리인을 선임하고, 현재 재판을 준비 중으로 알려졌다.
최 시인은 미투운동이 한창이던 지난 2월 초 JTBC 뉴스룸에 출연해 고은 시인의 성추행 의혹을 폭로했다. 이에 앞서 지난해 12월 문학계간지 <황해문화>에 '괴물'이라는 시를 기고했다. 이후 해당 시에 등장하는 'En 선생'을 두고 고은 시인을 지목한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최 시인은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 한창이던 2016년에도 한 언론사에 고 시인의 성폭력을 제보한 바 있다. 당시 문단 내 성폭력을 취재하던 아무개 기자가 최영미 시인에게 문단 내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인터뷰해 달라 요청했고, 최 시인은 익명으로 정리한 내용을 서면을 전달했으나 기사화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노력들이 인정받으면서 최 시인은 최근 서울시가 수여하는 '성평등상' 대상을 수상했다.
이날 기자회견을 연 #미투시민행동 측은 고은 시인 성폭력 피해자 및 목격자 제보센터를 운영하고 있음을 알렸다. 고은 시인의 성폭력 피해자나 목격자는 ▲02-735-1909 ▲withyou@stop.or.kr로 신고하면 된다.
한편 고은 시인은 성추행 의혹 폭로 이후 지난 5월 가진 한 인터뷰에서 "지금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시인으로서 명예를 유지하면서 계속 집필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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