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 일대 주요도로의 건설시기
유영호
먼저, 조선 초기 경복궁과 창덕궁을 연결하고 있던 도로는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바로 대로로 확장되었다. 그리고 10년 뒤인 1920년, 돈화문에서 종로까지만 개설되었던 돈화문로는 일본인 거류지인 혼마치(충무로)까지 직선으로 확장되어 당시 조선헌병대사령부가 위치한 현 남산골한옥마을까지 개통되었다.
당시 조선의 왕인 영친왕이 창덕궁에 머물고 있었다. 따라서 남산 왜성대에 위치한 조선총독부에서 영친왕이 있는 창덕궁까지 가려면 현재의 명동일대를 지나 크게 돌아가야 했다. 이러한 불편을 없애기 위해 바로 창덕궁과 총독부가 위치한 남산 쪽으로 직선도로를 개설한 것이다.
이후 1932년, 조선시대 내내 하나로 연결되어 있던 창덕궁과 종묘가 현재의 율곡로 개통으로 잘리고 마는데, 이러한 도시계획이 조선왕가의 맥을 끊어놓기 위한 행위였다는 주장이 있다. 본래 풍수지리로 보면 한양도성의 주맥이 하나는 삼각산(북한산)~보현봉을 거쳐 백악(북악산) 아래 경복궁으로 흐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보현봉에서 현 성균관대학교 뒷산인 응봉을 거쳐 창덕궁~종묘로 내려와 끝을 맺는다.
그리고 처음 한양도성을 설계할 당시 백악을 주산으로 하여 경복궁을 짓기로 하고, 도성설계의 교과서인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에 따라 좌묘우사(左廟右社), 즉 법궁의 왼쪽에는 종묘를, 오른쪽에는 사직단을 배치한 것이다.
그런데 종묘는 역대 국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곳이며, 사직단은 국가에서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둘의 성격과 상징은 전혀 다르다. 즉 사직단은 백성의 배를 불리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도읍이 아닌 다른 곳에도 얼마든지 세울 수 있지만, 종묘는 그 나라의 정통성과 법통을 상징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유일하게 도읍에만 건립할 수 있는 상징적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