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 표시된 것은 대한제국 시기에 조선정부에 의해 건립된 근대건축물이며, 1898년에 지어진 명동성당과 정동교회는 민간건축물로 위 지도에서 제외하었다.
유영호
이처럼 국호를 황제국으로 바꾸고, 또 황제만 갖고 있는 하늘에 대한 제사 권한을 행사하기 위해 '원구단'이라는 제단을 세웠다. 그 위치는 중구 소공동에 위치한 현 웨스틴 조선호텔 자리며 지금도 제단의 일부가 남아 있다. 이 곳은 본래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머물던 곳으로 그 후 중국 사신들이 머물던 남별궁이 있던 곳이다.
한편 중국 사신들을 맞이하던 영은문(迎恩門) 앞에는 '독립문'을 세웠다. 이 모든 것이 1897년에 일어난 일이며, 같은 해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60주년 기념식(다이아몬드 주빌리)에 참석한 특사 민영환의 보고를 받은 고종은 곧 있을 자신의 즉위 40주년 행사를 이용해 대규모 '칭경'(稱慶, 경사를 치르는) 예식을 하기로 준비한 것이 바로 '기념비전'이다.(위 지도 참조)
또한 이 칭경식에 올 외빈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갖가지 근대화사업을 착수했다. 일본 교토에 이어 동양에서 두 번째로 종로에 전차를 놓았고, 이를 계기로 그동안 온갖 가게들로 난잡했던 종로를 깨끗이 정리했다.
뿐만 아니라 법궁으로 사용하던 경운궁(현 덕수궁)에 석조전을 짓기 시작하였고, 최초의 서양식 공원인 탑골공원 역시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또 이때부터 시간표시법도 서양식으로 바뀌었다.
흥미로운 것은 시(時)는 서수로, 분(分)은 기수로 서로 다르게 표기한다. 왜냐면 '5시'를 말할 때 '오시'라 하면 기존방식의 '오(午) 시'(오전 11시~오후 1시)와 헷갈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5시 5분'은 각각 서수와 기수로 나눠 '다섯 시, 오 분'으로 표기하는 것이다.
이처럼 몰락하던 조선을 근대화된 모습으로 새로 세우고자 고종은 노력하였고 그렇게 변한 조선의 모습을 세상에 알리고자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칭경식을 위한 기념비전이 완공된 1902년 함경도에서 콜레라가 발생하여 행사를 1903년 4월로 연기했지만, 이번에는 영친왕의 두창으로 또다시 9월로 연기했고, 그나마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한 전쟁위기의 고조로 취소되고 말았다.
이후 러일전쟁(1904)과 을사늑약(1905)으로 조선은 사실상 식민상태에 들어갔고, 이를 벗어나려는 고종의 몸부림은 헤이그밀사사건(1907)을 마지막으로 왕위에서마저 쫓겨나고 말았다. 이처럼 이곳 '기념비전'은 대한제국의 희망과 좌절을 한꺼번에 껴안고 있는 역사적인 장소이다.
기념비전이 건립되는 모습과 그 후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연결해 놓은 아래 사진은 마치 대한제국 근대화를 꿈꿨지만 외세에 의해 좌절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하여 우리에게 씁쓸함을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