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현옥 서울시장의 취임식 겸 첫 출근날의 모습. 이날 하루 만에 특명 8호까지 발표하는 등 그야말로 그의 재임기간 내내 서울시는 ‘공사 중’이었다.
서울시청
이렇게 내려진 특명 1호는 정확히 보름 뒤인 4월 19일 광화문(세종로)지하도 공사를 착공하게 만들었고, 이것 외에도 같은 날 신세계백화점 앞 육교를 착공했고 도로 공사 등 각종 공사를 군대식으로 밀어붙였다. 그는 "24시간 5교대로 단 1분도 쉬지 말고 공사를 하라"며 관계자들을 다그쳤다.
이리하여 광화문지하차도는 5개월 만에 완공시켜 지금까지 광화문네거리의 땅 속을 십(十)자 형태로 관통하고 있다. 당시 대리석 기둥과 조명등으로 매우 화려해 보였으며, 김현옥은 "동양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지하도"라고 자랑했지만 완공 6일만에 금이 간 천정에서 물이 쏟아져 지나던 행인을 덮치고, 바닥이 가라앉는 등 부실공사가 드러났다. 하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공사를 계속 내밀었다.
한편 광화문네거리는 이렇게 변하고 이후 종로 확장공사로 인하여 '기념비전'이 현재의 자리로 약간 이전한 것이다(1966년 광화문 지하도 공사… '속전속결' 국가적 사업이었죠': 서울신문 2013년 1월 5일).
이처럼 김현옥은 서울시장 취임 후 광화문네거리를 첫 사업으로 시작하여 이후 서울 외곽간선도로를 확장하고, 곳곳에 육교와 지하도를 건설했으며, 또 터널을 뚫기 시작하는 등 그야말로 서울시 전체를 '공사중'으로 만들었다. 서울시 주요 외곽간선도로(독립문~구파발, 돈암동~수유리, 왕십리~광나루, 청량리~망우리 등)의 확장은 물론 각종 터널(사직터널, 삼청터널, 남선1호-2호터널), 강변도로, 북악스카이웨이, 세운상가 등 모두 김현옥 임기 중에 건설된 것들이며 현재까지도 일부 남아있는 서울시의 육교 상당수가 그의 임기 때 건설되었다. 이리하여 그에게는 '불도저 시장'이라는 별명이 항상 따라 붙는 것이다.
하다못해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유격대의 청와대습격사건 이후에는 서울시는 아예 "싸우면서 건설한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여의도윤중로를 건설하였다. 하지만 그처럼 불같이 밀어붙이던 김현옥의 날림식 도시계획은 1970년 4월 8일 와우아파트 붕괴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김현옥의 서울시장 재임시절 이러한 날림식 도시계획은 당시의 사회경제적 여건상 불가피했던 부분도 상당했던 것은 사실이다. 어쨌든 그의 재임 4년 동안 현 서울시 도시계획의 기초가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1968년 1월 21일 북의 청와대습격 사건 이후 서울시가 여의도 윤중로 위에 내건 건설 표어(1968. 5. 31)
서울시청
한편 취임 후 제1공약이 서울시도로교통 완화였듯이 그는 열흘 지나 서울시경 앞, 신세계백화점 앞, 대한극장 앞 등 6개의 육교를 착공했고, 6월에는 안국동로터리, 이대입구 등 10개를 착공해 그 해 총 16개의 육교를 건설했다. 이처럼 육교의 무더기 착공에 한 야당의원은 '서울특별시가 아니라 서울육교시'라고 논평했다(경향신문 1966.7.30).
더욱이 이러한 본격적인 육교시대와 더불어 우리나라에서는 미니스커트가 유행하면서 여성들은 상당히 불편했다. 특히 이대입구에 육교가 설치되면서 결국 일부 이대생은 논의 끝에 '육교 사용 보이콧'을 결정했다고 한다(동아일보 1966.8.29)
광화문삼거리?
앞서 이야기했듯이 일제강점기 현 광화문네거리에 있던 황토현을 깎아내고 도로를 평탄화 했다. 지금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광화문네거리에서 덕수궁 방면으로 뚫린 길은 그저 작은 도로가 있었을 뿐 본래 삼거리였다. 광화문에서 교보빌딩까지는 조선의 한양 천도 이래 육조거리(일제강점기 광화문통)라는 한성부에서 가장 큰 도로였으며, 그 양 옆으로는 이호예병형공 등 육조를 위시한 각종 관청이 늘어섰다.
그리고 그 끝 부분인 광화문네거리에는 나즈막한 황토현 고개마루가 조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바로 덕수궁 쪽으로 빠지는 것이 아니라 종로1가를 따라 현 종각까지 가서 남대문 방향으로 큰 길이 나 있었고 종각 일대에는 육의전을 비롯한 시장이 들어서 있었다.
▲ 일제강점기 태평로(광화문~남대문 구간) 건설 전후의 변화
유영호
그러나 1913년 무렵 광화문네거리에서 남대문까지의 도로 역시 '광화문통'과 같은 크기의 넓은 직선의 도로망이 새로 조성되었다. 뿐만 아니라 도로명칭도 그 이전의 '신교통'(新橋通)에서 '태평통'(太平通)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는 당시 경성의 중심과 일본군기지가 있는 용산을 직선으로 잇는 작업이었으며, 향후 이 직선상에 놓이게 될 경복궁 조선총독부(1926)와 경성부청(1926) 그리고 남산에 들어서게 될 조선신궁(1925)의 공사를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동안 경복궁과 광화문네거리에 존재했던 황토현 및 숭례문을 직선으로 연결하지 않고 종각을 거쳐 이르도록 '고무래 정'(丁)자 모양으로 도로를 개설한 것은 풍수지리상 불의 산인 관악산의 화기가 법궁으로 바로 미치지 못하도록 한 조치였다. 하지만 조선총독부의 도시설계에서 그것은 아무런 의미 없이 사라지고 '정(丁)' 자 형태의 도로망은 '일(一)' 자 형태의 도로망으로 바뀌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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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2015), 『서촌을 걷는다』(2018) 등 서울역사에 관한 저술 및 서울관련 기사들을 《한겨레신문》에 약 2년간 연재하였다. 한편 남북의 자유왕래를 꿈꾸며 서울 뿐만 아니라 평양에 관하여서도 연구 중이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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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도저 서울시장', 이명박이 원조 아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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