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과 의사이자 첼리스트였던 그는 비토첼로라는 예명으로 불리는 것을 좋아했다.
박정연
그는 이 나라 수백만 어린이 환자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푸른 눈의 스위스 출신 의사다. '캄보디아의 슈바이처'로 칭송받을 만큼, 그는 가난하고 아픈 이 나라 사람들을 위해 헌신했다. 그는 소아과 전문의로서의 능력은 물론이고 병원운영에도 뛰어난 능력과 수완을 발휘했다.
그뿐 아니다. 그는 독지가들로부터 자선후원금을 받아내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했던 인물로도 유명했다. 수 십년 간 유럽 전역을 돌며 수많은 후원단체와 개인 독지가들을 끌어들였다. 직접 발로 뛴 덕분에 매년 수백만 달러가 넘는 거액의 후원금들이 캄보디아 현지 어린이병원에 답지했다.
그러나 외부 후원금에만 의지해 해마다 늘어나는 환자들을 무료로 치료하기엔 병원재정이 갈수록 열악해졌다. 정부 지원금란 것도 보잘것없어 병원운영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병원적자가 눈덩이처럼 커지자, 리쉬너 박사는 1999년 중대결심을 내렸다.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씨엠립 어린이병원 강당에서 자선콘서트를 열기 시작했다.
도시 씨엠립은 앙코르와트를 보기 위해 연간 3~4백 만 명 이상이 찾는 세계적인 관광지다. 그 점에 착안해 그는 외국 관광객들을 병원 강당으로 불러놓고, 직접 첼로 연주를 선보였다. 직접 들어본 그의 연주 실력은 프로급에 가까웠다. 입소문을 타고 주말에는 거의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관광객들로 가득 찼다.
그는 의사로서 뿐만 아니라 음악인으로서의 재능과 자부심도 대단했다고 전해진다. 적어도 공연무대에 설 때만큼은 소아과 전문의가 아닌 전문음악인으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심지어 그는 '비트 리쉬너'라는 본명 대신 자신의 앞 이름 '비트'와 첼로를 합쳐 비토첼로(Beatoceollo)라는 예명으로 불리기를 원했다.
그는 늘 첼로 공연에 앞서 자신을 소개한 다큐멘터리 영상물 10여 편 중 하나를 골라 보여주고, 관람객들에게 공연 입장료 대신 기부금을 요구했다. 그는 후원금을 받는데 아무런 주저함이나 망설임 없이 늘 당당했다. 돈이 없는 가난한 젊은이들에게는 헌혈을 당당히 요구했고, 돈이 있는 자들에게는 기부금을 요구했다. 젊으면서도 돈이 있는 경우는 둘 다 요구했다. "돈이 없다면 피라도 기부하라"고 강당 입구에 쓰인 글이 지금도 기자의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