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공고, 동양공전 학생들의 시위동아일보 기사(1965. 6. 25)
동아일보
해방 이후 동양공고와 동양공전이 민주화운동의 역사에 그 이름을 알린 것은 1964년 한일회담 반대운동 때부터였다.
본격적인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알리는 3.24투쟁이 3일째 되던 3월 26일, 동양공고 2년생 박재동은 "중앙청 앞의 철통같은 데모저지선을 뚫은" 단 한 명의 학생이었다. 하지만 곧 잡히는 몸이 돼 경찰에 의해 짐짝 취급을 당한다.
동양공전, 동양공고 학생들의 시위 소식은 한일협정 조인과 함께 시작된 3일간의 휴교령이 끝난 1965년 6월 25일에도 언론에 등장한다. "동양공전 학생 약 120명과 동양공고 학생 약 380명이 교문을 나와 데모"를 시작했다. "남한강 입구까지 나왔다가 경찰이 최루탄 5발을 쏘고 저지"하자 "낮 1시 45분경 허성(15)군 등 40여 명이 연행되고 해산"되었다. 이 데모로 휴교령은 7월 3일까지로 연장된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김용원, 동양공고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동양공고는 1975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에 처해지는 8명의 무고한 시민 중 한 명인 김용원(1935~1975)이 1963년부터 강사 생활을 한 학교이기도 하다.
김용원은 흑석동(비계)에서 신혼살림을 차리고 강사 생활을 했는데, 부인 유승옥씨는 흑석시장에서 채소장사를 했다고 한다. 김용원은 동양공고 강사 시절인 1964년에도 박정희 군사정권이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마치 북한의 지령을 받아 벌어진 사건인 양 호도하려고 조작한 '인혁당 사건'으로 정보기관에 연행돼 수난을 당한 바 있었다.
그런데 10년 만인 1974년 경기고 교사로 재직하던 중 다시 한 번 중앙정보부로 연행돼 혹독한 고문을 당하게 된다. 이때 김용원은 '북한과 연계하여 인혁당을 재건하려고 했고 1974년에 발생한 대학생들의 민청학련 사건을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쓰고 서도원, 도예종, 우홍선, 이수병, 송상진, 하재완, 여정남과 함께 군사법정에서 사형 언도를 받았다. 그리고 불과 18시간 만에 사형에 처해진다. 당시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두고 있던 '국제법학자협회'는 김용원 등 8명이 사형당한 1975년 4월 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인혁당재건위 사건은 중앙정보부의 고문에 의한 조작사건"이라고 발표했고, 2007년 법원은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했다. 국가는 이들이 사형 당한 후 32년이 지나서야 '박정희 유신독재 정권이 정권안보를 위해 무고한 시민을 사법 살인한 사건이었다'고 인정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