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 레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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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레너는 소련의 힘을 빌려 정권을 잡은 뒤, 그쪽 의도대로 움직이는 척하며 정치세력 통합에 나섰다. 그런 통합 노력을 통해 미국의 호감까지 얻어냄으로써 소련의 영향력을 어느 정도 견제했다. 이를 통해 통합 지도자의 위상을 구축했다. 그의 리더십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는 좌우 대립을 방지하고 영세중립국을 향해 전진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가 1955년에 통일됐으니 칼 레너 시기에도 여전히 분단 상태에 있었던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오해다. 1955년에 통일됐다는 것은 그 해에 4개국 점령군을 철수시키고 군사적 통일을 이루어냈다는 의미다. 한국이나 독일 같은 분단은 없었다.
오늘날의 독일은 프로이센이란 나라의 주도 하에 건설됐다.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보다 열세에 있었지만, 19세기 중반부터는 오스트리아를 능가했다. 그런 프로이센 때문에 오스트리아는 말도 못할 고초를 겪었다.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프로이센은 1866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1871년에 프랑스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했다. 이 여세를 몰아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독일민족의 통일을 1871년에 달성했다. 오스트리아의 고난이 독일 통일의 제물이 됐던 것이다.
히틀러도 오스트리아를 제물로 삼아 세계 정복전을 벌였다. 그도 오스트리아를 합방한 뒤 세계를 상대로 대전을 일으켰다. 오스트리아가 독일과 인접해 있을 뿐 아니라 800년 넘게 유럽 정치를 주도한 신성로마제국의 후예이니, 독일의 야망가들로서는 '오스트리아를 제압하지 않고는 주변 세계로 뻗어갈 수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독일의 생리를 잘 알 뿐 아니라 독일 때문에 고초도 많이 겪은 1945년 이후의 오스트리아인들로서는, 당장에 독일 같은 강대국이 될 수는 없으므로 영세중립국으로 가는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신성로마제국을 주도했다는 과거의 영광에 젖어 있을 여유가 없었다. 전쟁부터 피하고 보려면 영세중립국을 향해 빨리 달려야 했다.
스위스와 달랐던 오스트리아의 상황
하지만, 좌우 분열은 쉽게 면했지만, 영세중립국의 길은 쉽지 않았다. 오스트리아를 점령한 강대국들의 동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1815년부터 영세중립을 유지하는 스위스처럼 되고 싶었지만, 그것은 여의치 않았다.
"스위스의 경우, 방위에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었고, 만일 중립이 실패하여 침략을 받을 시에는 자위력을 동원할 준비가 갖추어져 있다."-1998년 <전략논총> 제9집에 실린 하용출·박정원의 '약소국의 자주외교전략: 유럽 사례를 통해 본 가능성과 한계.'
오스트리아한테는 그런 조건이 없었다. 자력으로 중립국이 될 수 없으므로 열강의 승인이 필요했다. 다행히 미국은 호의적이었다. 미국 입장에서는, 오스트리아가 소련 쪽으로 넘어가지만 않는다면 중립국이 되어도 관계없었다. 오스트리아의 중립을 지켜주면 바로 위쪽 독일의 발호를 막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경제지원계획인 마샬 플랜을 통해 이 나라 경제를 지원했다. 소련 쪽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반면, 스탈린의 소련은 중립화를 못마땅해 했다. 2005년에 <평화학 연구> 제6호에 실린 이서행의 '오스트리아의 영세중립국 정책으로 본 통일 방안'은 당시 소련의 입장을 이렇게 정리한다.
"중립화에 대한 소련의 태도는 강경책이었고, 중립이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 스탈린 시대에 소련이 오스트리아에서 취하고자 했던 일차적 목표는, 연합국 분할 점령을 명분으로 오스트리아를 소련화하자는 것이었다."
오스트리아는 내부 단결을 쉽게 달성했다. 강대국이었다면, 이를 기반으로 자국의 뜻대로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힘이 없었기 때문에, 내부 단결이 '자기 뜻대로'로 연결되기 힘들었다. 그래서 중립국 지위를 보장받으려면 열강 지도자들의 심기를 살펴야 했다. 그 지도자 중 하나인 스탈린의 심기가 불편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영세중립화가 힘들었다.
그런 상태에서 1953년, '다행스런' 일이 벌어졌다. 오스트리아 입장에서 다행이었다. 스탈린이 그 해 3월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의 사망은 단순히 소련 지도부의 교체로만 이어지지 않고, 소련 대외정책의 변화로도 연결됐다. 뒤이어 권력을 잡은 흐루쇼프에 의해 소련은 서방세계와의 평화공존을 추구하는 쪽으로 대외전략을 수정했다.
소련의 평화공존 정책은 오스트리아의 영세중립화와 맞아떨어졌다. 오스트리아인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영세중립국이 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4개국 점령군의 철군을 관철시키고, 1955년 10월 26일 영세중립화 법률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그런 뒤 세계 55개국으로부터 명시적 혹은 암묵적 승인을 받아냈다. 오스트리아의 영세중립은 그렇게 달성됐다.
상당 부분은 남의 힘으로 영세중립을 얻었지만, 오스트리안들이 보여준 단결력이 원동력이 됐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내부 분열을 극복하지 못했다면, 스탈린 사망 후의 새로운 환경을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내부 단결력에 더해 영세중립을 가능케 했던 결정적 조건은, 미·소의 균형 하에 독일의 발호가 억제되고 양국이 오스트리아의 지위를 승인해주는 것이었다. 이런 구도가 유지된다면 오스트리아의 중립이 유럽에서의 전쟁 재발을 막아주리라는 기대 아래 세계 각국이 이 나라의 영세중립을 지지한 것이다.
그런데 이 구도는 1990년을 전후에 약간 흔들렸다. 독일이 통일되고 소련이 해체됐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소련을 계승했지만, 소련만큼 미국에 위협이 되지는 못하고 있다. 만약 앞으로 독일의 영향력이 더 강해지고 미·소 양국이 독일을 견제하지 못할 정도가 된다면, 오스트리아의 영세중립은 결정적 위기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오스트리아 영세중립(永世中立)의 '永世'(영세)는 현존 국제체제가 끝나기 전까지만 유효한 것인지도 모른다. 현존 질서 안에서만 영세일 수도 있다. 차기 국제질서에서도 오스트리아가 영세중립국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때는 영세중립의 조건이 달라질 수밖에 없고 그 조건을 충족해야 지금의 지위를 이어갈 수밖에 없다. 만약 스위스처럼 자력으로 영세중립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면, 물론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렇게 되면 외부환경의 변화를 덜 받으면서 영세중립국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
내부 단결을 바탕으로 세계열강을 설득해 영세중립을 얻어내고 평화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오스트리아의 영세중립화는 우리 민족한테 희망도 주고 메시지도 준다. 하지만 내부의 힘보다는 열강의 승인에 과도하게 의존한 영세중립이라는 점에서, 또 독일이 약체일 것을 전제로 하는 영세중립이라는 점에서, 무엇을 조심해야 할 것인지도 우리에게 시사해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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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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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세중립국' 오스트리아, 스탈린의 죽음이 없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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