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로학교 교정에서 찍은 사진 사진 중앙에 앉은 사람이 유길준인 것으로 보여 사진에 1915년이라 찍혀 있음에도 1914년 9월 30일 유길준이 사망하기 전에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은로초등학교
은로학교, 위기에 빠지다
은로학교는 초창기에는 주민들의 갹출과 노들나루 도선료 수익금의 1/3을 학교운영비로 투입하면서 운영에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1917년 한강인도교가 세워지면서 재정상 어려움에 빠지면서 위기를 겪게 된다.
이보다 앞선 1914년에 2대 설립자로 있던 유길준이 사망한 것도 은로학교에 안 좋은 영향을 미쳤다, 정미7적의 한 명인 조중응(1860~1919)이 3대 설립자로 취임한 것이다. 여기에 유길준과의 갈등으로 총무직에서 물러났던 배선영이 1918년 교장에 취임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결국 은로학교는 1920년에 이르면 제8회 졸업식을 그해 6월에야 가까스로 치르고 9월에는 학교 문을 닫고 만다.
은로학교가 다시 문을 연 것은 학교 교육에 대한 대중적 관심과 열기가 고조된 1922년의 일이다. 처음에는 대종교를 내세워 다시 열기 위한 시도도 하지만, 여의치 않게 되자 지역주민의 힘으로 만든 노량진교육회(회장 이석진, 총무 이원시)가 은로학교를 후원하는 중심 역할을 하면서 다시 열게 된 것이다. 이후 은로학교는 꾸준히 300여 명의 학생수를 유지했다고 하는데, 1934년의 학생수는 363명(남-269, 여-94)에 이르렀다.
그런데 은로학교의 위기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1923년 교장 배선영이 무리하게 돈을 끌어다 학교를 증축하는 과정에서 학교 대지와 건물을 담보로 일본인 삼정길(森政吉)에게 2000원의 빚을 진 사실이 밝혀지면서 은로학교는 풍파에 휩싸이게 된다. 1920년 학교가 폐교되면서 면민들의 관심이 약해진 틈을 이용하여 학교 대지와 건물의 소유권을 교장 배선영이 몰래 자신의 명의로 바꿔 놨던 것이다.
시흥군 북면 사람들, 면민대회를 개최해 은로학교의 위기에 맞서다
이렇게 되자 시흥군 북면 사람들은 면민대회를 소집해 면민들의 힘을 모으는 방식으로 은로학교의 위기에 맞선다. 우선 면민 공동으로 1000원을 모금하고 해동은행에서 1000원을 차입하여 2000원의 빚을 갚는다. 이어 면민대회를 소집하여 학교 명의를 '면민 공동소유'로 바꿀 것을 요구하고 나선다. 교장 배선영이 일방적으로 학교의 땅과 건물을 담보로 또다시 빚을 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배선영은 '면민 공동소유'가 법적으로 불가능함을 내세워 명의이전 요구를 거부하고 나섰다. 이에 면민들은 이번에는 소유권을 배선영 한 명이 아니라 공동설립자로 되어 있는 유억겸(유길준의 아들), 이응삼(본동리 대표), 차정환(노량진리 대표)을 포함한 4명이 분할 소유하게 해달라는 소송까지 걸었지만, '분할 소유를 주장하는 것은 나쁜 의도가 있는 것 아닌가'라고 역공한 배선영의 농간으로 이마저도 기각당하고 만다.
하지만 시흥군 북면 사람들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뜻을 이루지 못한 면민들은 노량진교육회를 비롯한 지역의 8개 단체를 중심으로 수백 명이 모인 가운데 다시 면민대회를 열어 배선영을 포함한 유억겸, 이응삼, 차정환 등 4명의 설립자가 동반 사퇴할 것을 요구하고 나선다. 믿을 수 없는 배선영을 몰아내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물론 뻔뻔한 배선영은 이 요구마저 받아들이지 않는다. 결국 면민들은 다시 소송에 돌입하는데, 불안감을 느낀 배선영은 1928년에 이르면서 다시금 은로학교 대지와 건물을 일본인 사택(寺澤)에게 저당 잡혀 2000원을 빌린 다음, 용산에 사는 또 다른 일본인 금정(今井)에게 2500원에 몰래 팔아넘기는 파렴치한 짓을 저지른다.
이 사실을 안 면민들은 배선영을 '배임횡령죄'로, 금정을 '장물고매죄'로 고소한다. 그러나 면민 소유임에도 소유권이 배선영 개인 명의로 돼 있는 현실이 바뀌지 않는 한, '배임횡령죄'나 '장물고매죄'가 성립되기는 어려웠다.

▲시흥군 북면 사람들의 면민대회 개최 소식을 전하고 있는 동아일보(1928. 10. 30) 시흥군 북면 사람들은 은로학교의 위기에 맞서 면민대회를 소집하여 면민들의 지혜와 힘을 하나로 모아 교장 배선영의 횡포에 맞서 싸웠다.
동아일보
그런데 하늘의 뜻이었을까. 은로학교를 산 일본인 금정은 2주 만에 급사하고, 같은 해 12월에는 배선영마저 갑자기 죽는다. 교장 배선영과 면민들 간에 벌어진 6년여의 갈등은 결국 이렇게 막을 내리게 됐다.
이 과정에서 북면 사람들이 면민대회를 여러 차례 개최하면서 은로학교를 살리기 위해 보여 준 모습은 요즘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는 '마을 민주주의'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더군다나 그동안의 경험을 발판으로 은로학교를 실질적인 면민 공동소유로 만들어내고자 한 시도 역시 신선한 충격이었다.
은로학교는 지역주민들의 '복합 교육문화 공간'
사실 은로학교는 시흥군 북면 취학아동의 교육기관 역할만 한 게 아니었다. 은로학교는 노량진청년회·용흥청년회 같은 지역단체와 조선일보·동아일보의 시흥지국 같은 언론단체들의 강연회, 주민 위안공연 등 각종 행사가 벌어지는 공간이기도 했고, 노동야학-부녀야학을 비롯하여 정식 교육을 받기 힘든 노동청년이나 여성들의 야학공간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북면 사람들의 '복합 교육문화 공간'이었다.
이때 저명 인사들이 강연을 위해 은로학교에 오기도 한다. 동아일보시흥지국에서 주최한 '독자위안대강연회'(1926. 2. 27)에는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저명한 독립운동가 한위건이, 노량진청년회가 주최하고 동아일보시흥지국이 후원한 '하계남녀강연대회'(1926. 8. 14)에서는 경성청년연합회의 백신애(여성해방과 경제조건), 박원희(우리의 사명)가, 같은 해 '추계강연대회'(10.18)에서는 유각경(우리는 배움으로 나가자)과 홍병선(YMCA, 교육과 조선의 장래)이 은로학교를 방문한다.
용흥청년회가 주최한 '춘계강연회'(1928. 6. 2)에는 어린이운동의 선구자 소파 방정환과 당시 최고의 인기 잡지였던 <개벽>(천도교 발행) 편집인 이돈화 등이 은로학교대강당에서 연사로 나선다.
은로학교에서는 지역주민과 함께 하는 문화프로그램도 여러 차례 개최됐다. 특히 '납량 활동사진 대회'(동아일보시흥지국 개최, 1927)라는 이름의 영화 상영회는 인기가 대단했던 모양이다. 3일간의 상영을 마친 후 2일을 더 연장하여 상영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다만, 이때 상영한 영화가 조선영화라는 것 외에 구체적인 영화 제목을 알 수 없는 부분이 아쉬울 따름이다. 1934년에는 극작가이자 영화인으로 만담가이기도 했던 윤백남을 초청하여 '독자위안 야담대회'를 개최하기도 한다.
▲'납량 활동사진 대회' 개최를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1927. 8. 8) 보도에 따르면 이때 시흥군 북면에서는 최초로 영화가 상영되었다고 한다.
동아일보
한편, 은로로학교에서 교사직을 맡았던 이경응씨는 노동야학을 창립하여 20여 명의 지원자를 확보, 야학을 시작했다. 1929년, 노동야학에 참여하는 아동 수가 무려 240여 명에 이르게 된다. 이밖에 은로학교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는 수해 피난민들의 피난처가 되기도 하고, 1926년 순종이 승하했을 때에는 분향소가 설치돼 추모객들의 통곡이 이어진 장소도 은로학교였다.
이 정도면 은로학교는 지역사회에서 학교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가장 모범적으로 실천한 교육기관이었다고 할만 하다. 오늘날 지역사회 활성화를 위해 마을과 학교가 어떻게 결합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확산되고 있는데, 그 고민을 푸는 열쇠를 바로 일제강점기 은로학교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을 아닐지 주목해 볼만한 가치가 충분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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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동작구 근현대 역사산책>(2022) <현충원 역사산책>(2022), <낭만과 전설의 동작구>(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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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로학교의 역사에서 '마을 민주주의'의 미래를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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