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광에서 작업하는 강제징용 노동자. 용산역 광장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극도로 위험한 환경으로 내몰면서도, 미쓰비시 그룹은 기본 의료조차 제공하지 않았다. 한국인들의 감기는 질병으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쉬고 싶다고 말하면, 주사바늘이 아니라 몽둥이를 들었다. 전봇대에 묶어놓은 뒤,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한 대씩 때리도록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정도였으니, 주거환경이 좋았을 리 없다. 일본인들에게는 괜찮은 주거 공간이 제공됐지만, 한국인들한테는 비좁을 뿐 아니라 햇빛도 들지 않는 공간이 주어졌다. 파도가 거칠어지면 바닷물이 방에 스며들기도 했다고 한다. 봉급도 안 주면서 이런 식으로 대우했다면, 노예노동이란 표현 말고는 적합한 용어가 없을 것이다. '강제노동'은 너무 신사적인 표현이다.
이런 노예노동이 오늘날 일본 경제를 만든 기반이 됐다. 1894년 청일전쟁 배상금을 기반으로 일어선 일본 경제는 한국·타이완·오키나와·만주 등에 대한 식민지배(특히 강제징용)를 토대로 고도의 급성장을 이루었다.
1930년대의 대공황 속에서도 일본 경제가 큰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식민지에서 병력뿐 아니라 노동력·토지·자원을 공짜로 착취하고 이를 기반으로 영토를 늘려나갔기 때문이다. 위의 신희석 논문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일본 기업의 발전은 19세기 이래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당시 일본의 주요 기업이었던 야하타제철의 경우, 청일전쟁 승리 후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청나라로부터 받은 막대한 배상금으로 설립되었다.
1930년대 대공황 중에도 중국 침략에 힘입어 일본 경제는 연평균 5% 성장을 기록하였고 특히 중화학공업이 비약적으로 성장하였다. 이 시기에 성장한 신흥 재벌은 거의 전적으로 군수계약에 의존하여 성장하였다. 때문에 연합국이 일본의 전쟁 수행을 가능하게 한 군수 재벌의 해체를 요구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처럼 일본 기업들은 식민지 착취를 통해 지금의 위치까지 오게 됐다. 그러니 전범 기업이라 부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기업들이 아직도 일본 경제의 주요 축을 구성하고 있다.
전쟁범죄의 결과물이 현재의 일본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연합국이 군수 재벌의 해체를 요구했지만, 그냥 요구에 그칠 뿐이었다. "연합국은 일본 경제인의 전범 소추(기소)를 적극 검토하였으나, 이는 결국 무위로 끝났다"고 위 논문은 말한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일본 정부나 군대뿐 아니라 일본 기업들까지 전쟁 범죄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명확히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앞으로 동종 소송이 제기되고 이것이 국제적으로 확산되면, 일본 기업들의 도덕성이 땅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이번 판결을 보도하면서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고 표현한 것은 이 문제가 일본 경제에 미칠 메가톤급 영향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