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사국방부가 1967년 발간한 <한국전쟁사 1권> 빨간 네모칸 안에 여순사건 당시 전사한 장교들 명단이 나온다.
정병진
올해로 여순항쟁(여순10·19사건)이 70주년을 맞았지만 국방부가 당시 전사한 장교들 명단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혼선을 빚고 있음이 드러났다. 국방부가 펴낸 <한국전쟁사1권>에서는 21명의 장교가 사살됐다고 밝혔지만 정작 공훈록에는 12명만 등재됐고, <한국전쟁사 1권>에서 제시한 전사 장교 명단마저 정확하지 않음이 밝혀졌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1967년 발행한 <한국전쟁사 1권>은 "반란과 토벌과 숙군"을 다룬 장에서 여순사건을 다룬다. 여기서는 "지하 남로당이 14연대 조직책인 지창수 상사에게 제주로 출동하기 전 기회를 엿보아 반란을 일으키라는 지령을 내렸고, 지 상사가 그 지령대로 사병들과 반란을 일으켜 장교들을 사살·구금하고 여수를 점령하였다"고 설명한다.
이어 "지 상사는 자신을 해방군 연대장이라 선언한 뒤 14연대 병력을 반군지휘체계로 편성하고 연대 내에 잠입한 장교들을 색출해 그 대부분은 사살하고 군의관처럼 이용가치가 있는 자들은 구금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진압하러 나오다가 반군에게 발견돼 현장에서 사살당한 장교 명단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제1대대장 김일영 대위(제2기생), 제2대대장 김순철 대위(제2기생), 제3대대장 이봉규 대위(제2기생), 정보주임 김내수 중위(제4기생), 작전주임 강성윤 대위(제2기생), 진도연 중위(제3기생), 이병우 중위(제3기생), 길원찬(제3기생), 김녹영 소위(제5기생), 맹택호 소위(제5기생), 박경술 소위, 민병흥 소위(제5기생, 김진룡 소위(제5기생), 이상술 소위(제5기생), 장세종 소위(제5기생), 이병순 소위(제6기생), 유재환 소위(제6기생), 김남수 소위(제6기생), 김일득 소위(제6기생), 노영우 소위(제6기생), 이상기 소위(제6기생) 이상 21명. (454~455쪽)
이들 중에서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호국전몰용사 공훈록에 나오는 명단과 일치하는 인물은 12명(강성윤, 김순철, 김일영, 이강우, 이병순, 이봉규, 진도연, 김내수, 박경술, 민병흥, 장세종, 이상기)이다. 한데 이 11명의 공훈록의 공훈사항을 살펴보면 강성윤~진도연, 장세종, 이상기까지는 제5여단 예하 제14연대 소속이 맞지만, 나머지 장교는 소속 부대가 각기 다르다. 김내수 중위는 육군본부 직할부대 소속이고, 박경술 소위는 제1연대, 민병흥 소위는 11연대 소속이다. 전사한 날짜도 박경술 소위는 20일이며, 나머지 10명은 10월 22일로 나온다.
요컨대 국방부가 <한국전쟁사 1권>에서 여순사건 당시 반군에 의해 사살당한 14연대 장교들이라며 제시한 장교 20명 중에는 공훈록에 누락된 인물이 8명에 달하고, 공훈록에 등재된 장교 12명 중에서도 14연대 소속이 아닌 사람이 3명이나 됨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공훈록에 오른 여순사건 관련 장교 12명 중에서 그 유해를 서울 국립현충원이나 대전 현충원에 안장한 사람은 9명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 3명의 장교(김일영, 이봉규, 김내수)는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에만 기록돼 있을 뿐이다.
주철희 박사(여순항쟁 연구자)는 그의 책 <불량 국민들>에서 여순항쟁 당시 반군에 사살됐다는 장교들 명단이 발표 자료마다 상이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가령 국방부가 펴낸 <한국전쟁사 1권>에서는 당시 사살당한 장교를 21명이라 밝혔지만, 정창국의 책 <육사졸업생>(중앙일보사, 1984)은 "대위급 2기생 4명과 중위급 3기생 4명, 5기생(중위급) 7명, 6기생(소위급) 7명 등이 학살당했다"고 하여 총 22명의 장교가 희생됐음을 언급해 1명의 차이가 난다.
또한 1948년 12월 1일 서울운동장에서 정부 요인이 두루 참석해 거행한 합동위령제, 즉 전남반란 작전에서 공훈을 세우고 전사한 군인 91명의 합동위령제에는 14연대 장교가 13명밖에 포함되지 않았다.
기자는 "똑같이 목숨을 희생하고도 누구는 공훈록에 등재돼 국가 유공자가 되고 누구는 아예 명단조차 파악이 안 되거나 명단에 들어 있어도 국가 유공자에서 제외된 사유가 무엇인지" 밝혀달라며, 지난 10월 중순 국방부에 민원을 제기했다. "당시 사살당한 하사관들은 아예 명단조차 파악이 안 되는 상황"이라며 "한 사람도 억울한 일이 없게 해 달라"는 요청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