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개선 환영대회(1945. 12. 19)1945년 12월 19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임시 정부 개선 환영대회”의 모습이다. 이날 대회에는 10여만 명의 군중이 운집하였다. 김구는 이 자리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대혁명의 민족적 대유혈투쟁 중에 산출한 유일무이한 정부“라고 했다.
우리역사넷
갑자기 이상한 방향으로
1919년의 3·1운동을 3·1혁명이라고 부른 것은 비단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백범 김구만이 아니었다. 해방정국에서 쏟아져 나온 모든 언론은 3·1운동을 3·1혁명이라고 자연스럽게 불렀고, 1946년부터 진행된 삼일절 기념식에서도 좌우를 막론하고 3·1운동을 3·1혁명이라고 불렀다.
이는 5·10 단독총선 결과로 탄생한 제헌국회의 제헌헌법 논의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제헌헌법 초안의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三一革命의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라고 하고 있었다. 초안에는 나중에 확정된 '기미 삼일운동'이 아니라 '3·1혁명'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헌법기초위원회(위원장 서상일)가 제출한 제헌헌법 초안을 가지고 토론할 때 처음으로 전문 수정의 필요성을 제기한 인물은 초대 국회의장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헌법 제2독회(7월 10일)에서 "우리들 대한국민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민족으로서 기미년 삼일혁명에 발기하야 처음으로 대한민국정부를 세계에 선포하였으므로 그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야 자주독립의 조국재건을 하기로 함"이라는 의미를 담은 문구를 넣자고 제안했다.
이승만의 뜻을 받은 윤치영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년 삼일혁명으로써 대한민국을 수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그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지금 독립민주정부를 재건함에 있어서"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제헌헌법 전문 수정안을 공식 제출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논의가 이상한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발언권을 얻은 조국현이 수정안에 대해 지지를 표명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혁명이라는 문구는 불가하다"면서 '삼일혁명'이라는 표현을 문제 삼고 나선 것이다.
"삼일민족운동이라는 것이 일본의 유인정권 밑에서 제도를 고치자는 혁명이 아닙니다. 대한이 일본에게서 뺏겼든 그놈을 광고하자는 운동인만큼 혁명은 아닙니다. 항쟁이라고 할지언정 혁명은 아니요 혁명은 국내적 일이라는 게 혁명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태조가 고려왕조를 전복시킨 것이 혁명이고 갑오의 운동이 혁명운동이고 우리의 조선이 일본하고 항쟁하는 것은 혁명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다가 혁명을 쓴다면 무식을 폭로하는 것이라고 내가 생각하기 때문에 이 혁명 글자를 변경해서 '항쟁'이라고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 제헌국회 국회의사록
조국현이 '3·1혁명'이라는 명칭을 부정하고 '3·1항쟁'으로 변경하자면서 내세운 논리는 사실 난센스에 가까웠다. 이미 '민족혁명', '민족해방혁명'이라는 개념이 일반화되어 있던 시대에 '3·1운동이 일제에 맞선 투쟁이었기 때문에 혁명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무식을 폭로하는 것'이라는 논리는 사실 '조국현 자신의 무식을 폭로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당시 제헌국회 의장이었던 이승만이 적극 호응하고 나서면서 일이 꼬인다.
"혁명이라는 것이 옳은 문구가 아니라는 말씀을 내가 절대로 찬성합니다. 혁명이라면 우리나라 정부를 전복하자는 것인데 원수의 나라가 와서 있는 것을 뒤집어 놓는 것은 혁명이라는 게 그릇된 말인데 '항쟁'이라는 것은 좋으나 거기다 좀 더 노골적으로 '독립운동'이라고 그러면 어떱니까."
- 제헌국회 국회의사록
이승만은 '3·1혁명'이라는 명칭 대신 '3·1독립운동'으로 하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이에 제헌국회에서는 '항쟁'으로 하자, '광복'으로 하자 설왕설래 하는 와중에 조헌영이 '3·1운동'으로 하자는 새로운 제안을 한다.
"그 '삼일혁명'이라는 것과 '광복'이라는 것과 '항쟁'이라고 하는 것이 다 적당치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혁명이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고 항쟁이라는 것은 좀 우리 위신상 관계가 있고 또 광복된 것이 아니니까 광복이라는 것이 적당치 아니해서 제 생각에는 그냥 '삼일운동'이라고 하는데...."
- 제헌국회 국회의사록
이후 제헌국회는 제헌헌법을 신속히 통과시켜야 한다는 주장에 밀려 3·1운동의 의미에 대한 충분한 검토와 토론을 생략한 채 '그냥 무난하게' 3·1운동이라는 명칭을 채택하고 만다.
이렇게 해서 제헌헌법 초안에 있던 3·1혁명이라는 명칭은 사라지고 3·1운동이 공식 명칭으로 정리되었고,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제헌의원 선출을 위한 5·10총선거에 남로당을 비롯한 좌파는 물론 김구, 김규식, 조소앙 등 임정계열 주요인사가 불참한 사정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