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사 꿈 이루려다 일제의 들러리가 된 여성

권기옥·안창남과 달랐던 박경원의 비행 인생

등록 2019.03.10 11:20수정 2019.03.10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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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경원.

박경원.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1920년대만 해도 일반 대중은 비행기를 무서워했다. 이런 시대에 비행기 조종사의 길에 과감히 도전한 인물이 있다. 바로, 박경원(1897~1933년)이다. 2005년 영화 <청연>에서 배우 장진영이 연기한 인물이다.

그런데 박경원의 꿈은 세상의 협조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혼자 열심히 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조종술도 배워야 하고 비행기도 확보해야 했다. 비행기를 함부로 띄울 수 없으므로 정치권력과의 협조도 필요했다. 바로 이 세상의 협조를 얻는 일에서 그는 중대한 결함을 남겼다. 동시대 '동업자'들인 안창남이나 권기옥과 상반되는 선택을 함으로써 그는 문제적 인물로 남게 됐다.

꿈을 이루기 위해 비행사가 된 박경원

박경원은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덕산동에서 출생했다. 학적부에 따르면, 1897년생이다. 고종이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꾼 해이자, 라이트 형제의 최초 비행이 있기 6년 전이다.

백과사전에는 1901년생으로 적혀 있다. 이렇게 된 이유가 있다. 1925년 도쿄 다치가와 비행학교에 입학할 때 28세였다. 당시에는 이 나이 여성이 미혼으로 사는 것도 힘들었고 사회생활을 하는 것도 힘들었다. 그래서 비행학교에 들어갈 목적으로 네 살 정도를 깎았던 것으로 보인다.

박경원은 축복 받으며 태어난 아기가 아니었다. 부모님은 남아를 고대했지만, 딸만 연달아 다섯이 태어났다. 그 다섯 번째가 박경원이다.

출생 직후 그의 이름은 경원이 아니라 원통이었다. 바랄 원(願)에 상자 통(桶), 문자 그대로 하면 통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는 정도의 뜻이었다. 관으로 들어가길 바란다는 의미였을 수도 있다. 딸을 다섯이나 낳아 원통(寃痛)하다는 뜻을 표현하고자, 뜻은 다르지만 발음이 같은 한자를 택했을 수도 있다. 어느 경우든, 부모의 편치 않은 마음이 담긴 것은 분명하다.


경원으로 개명한 것은 19세 이전 어느 시점이다. 중학교 학적부에 박경원으로 적혀 있다. 중학교에 들어간 게 1916년이니, 그 전에 개명한 게 확실하다. 경원은 공경할 경(敬)에 으뜸 원(元)이다.

냉대 받던 딸이 개명도 하고 중학교에도 갔다는 것은, 자기 권리를 찾고자 부모님과 투쟁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중학교 학력은 당시로서는 고학력이다. 운명에 순응했다면, 못 갔을 수도 있다. 그가 남다른 성격의 소유자였음을 다카하시 고준이 쓴 박경원 전기 <한일의 유광>은 아래와 같이 말한다.
 
"박경원의 성격과 성질을 여러 자료에서 찾아보면, '원래 자질구레한 일에 무관심, 타고난 성질은 온순·유화·활발·두뇌명민, 비할 데 없는 노력가, 남성적 성격, 남의 시중들기를 좋아하고 보스 기질, 강렬한 자기주장을 갖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가 비행사의 꿈을 꾼 것은 17세 때인 1914년이다. 이때 다카사에 다카유키란 조종사가 한반도 상공을 비행했다. 한반도 상공 최초의 비행이었다. 박경원은 신문에서 이 소식을 접했다. 이때부터 조종사를 꿈꿨다고 한다. <창공 예찬>이란 글에서 박경원은 이렇게 말했다.
 
"새들은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다. 자, 친구여! 이제 감탄은 그만두자. 하늘을 나는 거야. 나는 거야."

20세 때인 1917년, 박경원은 중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떠났다. 도쿄 옆 요코하마의 명주실 공장에서 약 3년간 직공으로 일했다. 그 뒤 대구로 돌아와 자혜병원에서 간호사 생활을 했다. 그렇게 모은 돈을 갖고 1925년(28세) 다치가와 비행학교에 입학했다.


독립운동을 위해 비행사가 된 권기옥

이 해는 중국에서 활동 중인 독립투사 권기옥(1901~1988년)이 윈난(雲南) 육군항공학교에 입학한 지 2년 뒤다. 권기옥은 3·1운동 만세시위 때문에 구류 3주를 받은 뒤,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 활동 때문에 6개월형을 받았다. 그는 1920년 9월 상하이로 가서 활동하다가 1923년 4월 임시정부 추천으로 항공학교에 들어갔다. 이때는 동갑내기 안창남(1901~1930년)이 도쿄 오쿠리비행학교에 입학한 지 3년 뒤였다.

1914년에 신문을 통해 비행기를 접한 박경원과 달리, 권기옥은 1917년 5월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서 비행기를 실물로 목격했다. 미국인의 곡예비행이 거기에서 있었다. 김영주 공군사관학교 교수의 '한국 최초의 여류 비행사 권기옥'은 이렇게 말한다.
"권기옥도 당시 비행사가 되리라는 생각을 하였고, 항공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는 '비행기 타는 공부를 하여 일본으로 폭탄을 안고 날아가리라'는 각오를 하였다."
-역사실학회가 2007년 발행한 <역사와 실학> 제32권.
 
a  여류비행사 권기옥

여류비행사 권기옥 ⓒ 정혜주

 권기옥이 그런 꿈을 안고 중국 남서부에서 비행 교육을 받은 지 2년 뒤, 그보다 4세 많은 박경원이 일본에서 예비 조종사 길에 들어섰던 것이다. 그런데 박경원이 들어간 학과는 자동차학과였다. 비행기학과는 돈이 많이 들었다. 그래서 자동차학과에 들어간 뒤 비행기 조종술을 부전공으로 배우는 차선책을 선택했다.

<한일의 유광>에 따르면, 당시 비행기 1시간 조종에 드는 비용은 쌀 24포대였다. 지금은 쌀 1포대가 20킬로그램이지만, 그때는 더 무거웠다. 1시간 비행에 쌀 24포대가 공중으로 흩뿌려지니, 웬만한 재력으로는 조종술을 배우기 힘들었다.

박경원이 모색한 방법은 자기 얘기를 세상에 알리는 것이었다. 친척들한테도 후원을 부탁하고, 신문사에도 자기를 알렸다. <동아일보>가 반응을 보이고 기사를 실어주었다. 이를 계기로 대한제국 학부대신이었던 이용식이 거금을 내놨다.
 
 영화 <청연>.

영화 <청연>. ⓒ 코리아 픽처스

 
좀더 결정적인 후원자는 일본 체신대신 고이즈미 마타지로였다. 박경원이 1928년(31세) 도쿄 비행대회에서 3위 입상하는 것을 보고 후원을 자처했다. 당시 일본 항공산업은 체신부 관리 하에 있었다. 그래서 그가 박경원에게 관심을 보인 것이다.
고이즈미 마타지로는 2006년까지 총리를 지낸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할아버지다. 민족주의 정신이 강했다면, 그의 후원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박경원은 거절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 정부의 목표 중 하나는 비행강국 건설이었다. 체신성은 비행기를 통한 우편사업을 활성화시킴으로써 그 목표를 달성하고자 했다. 이 일을 하는 데 '억척 여성' 박경원의 이미지가 도움이 된다는 게 체신성의 판단이었다.

그 시기 사람들은 비행기를 신기해하면서도 직접 타려고는 하지 않았다.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 조종사를 내세우면 항공산업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커지고 항공산업도 커질 수 있다는 게 일본 정부의 판단이었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박경원을 후원하고 간판 비행사로 내세웠다.

비행사를 하다가 항일운동에 뛰어든 안창남

 
a  최초로 조국의 하늘을 날았던 안창남

최초로 조국의 하늘을 날았던 안창남 ⓒ 공군박물관

 
그의 행보는 권기옥이 비행학교 졸업 뒤 중국군 장성으로 활동하면서 중일전쟁(1937~1945년)에 참가했던 것과 대비된다. 안창남과도 어느 정도 대비된다. 안창남은 일본 정부와 군대의 지원을 받기는 했지만, 1923년 관동대지진 때 동포들이 핍박을 받은 뒤로 중국으로 망명해 항일 활동에 가담했다. 최은진 국가보훈처 연구원의 논문 '일제강점기 안창남의 항공독립운동'은 이렇게 말한다.
 
"주목할 것은 안창남처럼 일본에 유학했던 전상국·민성기·김연기 등 조선인 비행사들이 1920년대 중반부터 줄줄이 그의 뒤를 따라 중국군 및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한 사실이다. 안창남은 조선인 비행사들이 중국군에 참여하여 군사력을 증강하고 항일전쟁에 참전하는 등 중국 혁명운동을 통한 한국독립운동 방략을 추구하는 데 길잡이 역할을 하였다."
-독립기념관이 2016년 발행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55집

고이즈미 할아버지의 후원을 계기로 박경원은 유명 인사로 떠오르면서 개인용 비행기를 구입할 만한 재력을 갖게 됐다. 그 비행기 이름이 청연(靑燕) 즉 '푸른 제비'다. 그렇게 조종사의 명성을 높여가던 중인 1936년, 그는 평소 꿈꿨던 고향 방문 비행의 꿈에 다가서게 됐다. 일본 정부의 후원을 받아 일본-조선-만주-일본을 도는 비행이었다.

그런데 비행 타이틀이 '일본·조선·만주 친선 비행'이었다. 신생 괴뢰국 만주국까지 포함하는 '대일본제국'의 확대된 영역을 과시하기 위한 비행이었다. 고향 방문 비행이었기 때문일까. 그는 도전했다. 그러나 결국 그 비행이 마지막 비행이 됐다. 이륙 50분 만에 도쿄 남서쪽 100킬로미터 정도인 하코네산에서 그는 비행기와 함께 인생을 마감했다.

박경원은 일제강점기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가고자 했다. 그의 꿈은 세상 특히 정치권력과의 협조가 있어야 이룰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식민지배 권력과 손잡는 방법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특유의 정신력으로 개인적 역경을 극복해 나간 것은 대단하지만, 비행 기회와 돈과 명성을 얻는 그의 방법은 결코 부득이한 것이 아니었다. 권기옥·안창남의 사례는 박경원도 다른 길을 갈 기회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박경원은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일제 식민치하에서 자기 꿈을 이루어 나가다가, 친일로 해석돼도 할 말 없는 인생 궤적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향년 36세였다.
#박경원 #청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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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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