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동단결의 선언>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네 번의 독립선언
"1919년은 항일독립투쟁사에 한 획을 긋는 해였습니다. 3․1 독립선언은 누구나 잘 알고 있지만 독립선언이 세 차례 더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드물어요."
이에 대해 김 회장은 차분히 부연 설명을 했다.
첫 번째 독립선언은 그해 2월 1일 중국 지린에서 독립운동가 39명이 발표한 무오독립선언이다. 조소앙이 기초한 이 선언은 1919년 독립선언의 기폭제였다. 2월 1일이 음력으로 무오년이었으므로 '무오독립선언'이라고 일컫는다.
그 일주일 뒤인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의 조선유학생 대표들이 도쿄 YMCA 강당에서 두 번째로 독립선언을 발표했다. 그때 유학생들이 선언문을 국내로 전파시켰다.
그리고 그 세 번째로 3․1독립선언이 있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삼일독립만세운동이다. 그해 11월 28일 서울 안국동 네거리에서 네 번째로 대동단의 독립선언이 있었다. 이 일은 독립운동 자료집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시위 시작하자마자 일경에게 체포된 탓이다.
- '조선민족대동단'의 정체성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대동'이라는 말은 <예기>에 나옵니다. 19세기 영국의 사상가 로버트 오언의 '공상적 사회주의' 주장과 비슷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부모만을 부모로 여기지 아니하고, 자기 자식만을 자식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노인으로 하여금 그 여생을 미칠 곳을 가지게 하며…'"
자세히 듣고보니 사회주의적 이상향과 같았다. 청 나라의 개혁가 캉유웨이(康有爲)의 '대동사상'도 쑨원(孫文)의 '천위위공․ 세계대동'도 이와 비슷하단다.
- 할아버지는 임시정부에서 주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당시 임시정부 주요 인사들이 대부분 60세 미만이었으므로 74세의 할아버지는 임시정부 '고문'으로 추대됐습니다. 하지만 고령임에도 임시정부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중국어와 일본어에 능통하셨기에 주로 외교관을 하셨답니다. 임시정부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자리를 지키지 않자 대통령 후보로도 거론되기도 했답니다."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은 1922년 7월 4일 프랑스 조계지에서 세상을 떴다. 장례식은 임시정부 주관으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 상하이에서 김가진 선생의 장례행렬
김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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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오마이뉴스 이슈취재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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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가 출신 김가진은 왜 상해 임정으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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