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명신 장군의 묘베트남전 참전의 영웅으로 불리기도 하는 채명신 장군의 묘는 베트남전 참전용사 묘역 제일 앞에 있다. 채명신 장군이 육사 5기를 마치고 1948년 4월 10일 처음 부임한 곳은 제주4.3의 현장이었다.
김학규
` 채명신 장군은 5.16 쿠데타에 가담했지만, 그 자신은 다른 정치군인과 달리 군인으로 돌아갔다는 점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베트남전 과정에서는 한국군의 독자적인 작전지휘권 보장을 관철시켰는가 하면 "한국군은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1명의 양민(민간인)을 보호한다"는 모토를 내걸고 사령관직을 수행했다.
채명신 장군은 2013년 사망하기 전에 "내가 죽거든 일반 사병묘역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겨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채명신 장군 묘가 그의 유언을 제대로 반영한 모습인지에 대해서는 비판의 목소리도 많다.
'죽은 자의 정치학'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산 자들이 죽은 자를 활용하는 '산 자의 정치학'이라고 해야 할까. 채명신의 묘는 일반사병 묘와 '함께' 있지 않고 묘역 제일 앞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채명신 장군은 죽어서도 사병을 이끌고 있는 사령관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고향이 이북(황해도)인 채명신은 월남해 육사 5기로 교육과정을 마친 후, 4.3사건이 있은 직후인 1948년 4월 10일 제주 9연대에 소대장으로 첫 부임해 군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부임 후 불과 한 달 만에 김익렬 연대장이 해임되고, 이어 박진경(중령)으로 연대장이 바뀌는 경험도 한다.
6월 16일의 미군 비밀보고서에 이때부터 9연대 박진경의 작전으로 불과 44일 동안 "약 3000여명이 체포되고 심사를 받았다"고 했을 정도로 무고한 민간인을 마구잡이로 체포하는 등 강경일변도 작전을 펼친다. 당시 무장대는 500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채명신의 제주 4.3에 대한 경험은 전혀 부정적이거나 비판적이지 않다. <제주 4.3 사건 진상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박진경 대령이) 양민을 학살한 게 아니라 죽음에서 구출하려고 했다, 4.3 사건 초기 경찰이 처리를 잘못해 많은 주민이 입산했다"라며 "그런데 박 대령은 폭도들의 토벌보다는 입산한 주민들이 하산하는 데 작전의 중점을 두었다"라고 말한 것으로 나온다.
그의 회고록 <사선을 넘고 넘어>(매일경제신문사)를 보면 "남로당의 인민해방군은 주민들의 배타성을 이용,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다. 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 총선거를 앞두고 이를 방해하기 위해서였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제주 4.3의 원인을 1947년 3월 1일 삼일절 기념대회 당시 벌어진 경찰 발포 사건으로부터 찾지 않고 남로당이 남한 단독 총선을 방해할 목적으로 4.3을 일으켰다는 왜곡된 인식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4.3 직후 무장대 대장 김달삼(본명 이승진)과 평화협상을 벌였던 9연대장 김익렬 중령을 "색깔이 불분명하고 미온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했고, '무모한 토벌을 막고 동족상잔을 피하기 위해 암살을 벌였다'고 주장한 문상길 중위에 대해서는 "좌익 사상에 물들어 김달삼 지령에 따라 연대장을 암살했다"라고 매도했다. 반면, 1948년 3월 한림면의 박행구를 고문으로 살해하는 등 제주 4.3의 한 원인이기도 했던 서북청년회 단원들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며 '용맹스럽다'고 했다.
채명신 장군이 주월한국군사령부 사령관 시절 내걸었던 "한국군은 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한다"라는 모토가 실제 현실과 너무나 큰 괴리가 있었다는 지적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다. 한국군에 의한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반복적으로 일어났던 베트남전을 되돌아볼 때, 제주 4.3의 현장에 있었음에도 이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성찰이 없었던 채명신·이세호가 베트남전 초대 사령관과 2대 사령관을 역임했다는 사실은 결코 무관할 수 없다는 진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제주 시인 이종형도 베트남을 방문하고 쓴 시 <카이, 카이, 카이khai, khai, khai>에서 "쯔엉탄 아랫마을 깟홍사 미룡촌에서 태어난 판 딘 란/ 떨리는 목소리로 태어난 지 사흘 만에/ 호랑이 표식을 단 남한 병사에게 어미 잃은 사연을 얘기하는데" 어쩔 수 없이 "제주의 4월을 다시 떠올리고" 만다.
제주 4.3에서 배운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경험은 20년 후 베트남에서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로 이어진다. 그리고 젊은 시절 베트남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던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의 신군부세력은 1980년 광주에서 자국민을 상대로 그렇게 쉽게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했다.
제주 4.3과 안재홍 당시 민정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