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추'를 경계하며 노년을 산다

등록 2019.04.09 15:50수정 2019.04.09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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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언 70고개를 넘기고 보니 자연 발걸음도 느려지고 머리 회전도 둔해지는 것 같다. 최근에는 어느 마트에 갔다가 가벼운 물건을 들고 이동하던 중에 다리 근육 마비 현상으로 그만 넘어지는 사고도 있었다. 원인은 참외 등 과일 과다 섭취로 인한 혈중 칼륨 수치 증가였다.


내가 이미 노년임을 자각하다 보면 가장 두려워지는 것이 생각하는 힘의 퇴화 현상이다. 몸은 비록 늙어가지만 정신만큼은 늘 청년이기를 소망하는데, 그래서 오늘은 이런 글도 쓰지만 그것마저도 내일은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무튼 요즈음 내가 가장 경계하는 말은 '노추'라는 용어다. 추하게 늙지는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명색 유명인으로 살아가면서 추하게 늙어 가는 이들, 자신의 노추를 전혀 깨닫지도 못하고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이름 있는 늙은이들을 지면이나 영상을 통해 종종 보기 때문이다. 그들을 볼 때마다 나는 절대로 저들처럼 추하게 늙지는 말아야 한다고 다짐하곤 한다.

그런데 노추의 실상들을 종종 내 눈으로 직접 접하며 슬픔과 연민을 느끼기도 한다.

좌파와 우파를 가르는 70년 동안의 고질병
 
병상에서 손자 녀석을 안고 지난 3월 1일 서울 중앙보훈병원 병상에서 생후 7개월 손자 녀석을 안고 볼에 입을 맞출 수 있었다.
병상에서 손자 녀석을 안고지난 3월 1일 서울 중앙보훈병원 병상에서 생후 7개월 손자 녀석을 안고 볼에 입을 맞출 수 있었다. 지요하
 
베트남 전쟁 고엽제와 관련하는 병고를 겪으며 사는 처지라 한 달에 한 번 꼴로 서울 중앙보훈병원엘 가곤 한다. 최근에는 복막염 증세로 22일 동안 입원을 하기도 했다.

한 번은 보훈병원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로비를 지나는데, 노인들 두세 명이 내게로 와서 다짜고짜 종이 한 장을 내밀며 서명을 하라고 했다. 피우진 보훈처장을 물러나게 하려는 청원서라고 했다. 이유가 뭐냐고 물으니 보훈처 산하단체들의 행사에 피 처장이 한 번도 참석하지를 않으니 보훈단체들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했다.


또 해방 후 월북을 한 김원봉을 비롯한 여러 공산주의자들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하려 한다는 등 이런저런 이유들을 대는데,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너무 치졸하고 해괴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다른 곳에서도 여러 명 노인들이 병원을 찾은 환자나 보호자를 붙잡고 서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설명을 들을 새도 없이 서명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피우진 보훈처장이 '종북 좌파'라는 말 한마디에 선뜻 서명을 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서명하기 싫다고 고개를 저었다. 대뜸 "왜?"라는 추궁이 왔다. 너무 치졸하고 저급하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꾹 참는 대신 점잖은 소리로 한마디 했다.

"나는 이런 일에 서명할 이유가 없어요."

그리고 곧 걸음을 옮기니 그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길을 비켜주었다. 그러면서도 "빨갱인가 봐" 하는 소리가 누군가의 입에서 나왔다. "빨갱이 되기 참 쉽네" 나는 중얼거리며 아내의 손에 이끌려 채혈실로 갔다. 내 왼쪽 팔에 주사바늘을 꽂고 검사용 피를 뽑는 간호사에게 나는 혼잣말하듯 말했다.

 "오늘 보훈병원에 추하게 늙는 철부지들이 많이 왔네요."

 그러자 내 말을 알아들은 간호사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어머, 아버님 같은 분도 계시네요."

 나도 씨익 웃어 주며 말했다.

"나는 늙은 나이에도 주구장창 빨갱이 타령이나 하고, 우파 좌파만 가르는 노털들이 제일 싫어요 추하게 늙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내 말을 알아들은 옆의 간호사도 내게 생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요지부동의 편견과 고정관념
     
종종 이용업소를 이용한다. 60대 부부가 함께 운영하는 업소다. 한 번은 차례를 기다리며 TV를 보는데, 일단의 대학생들이 '자유한국당' 당사에 몰려가서 "토착왜구당 해체하라!"라고 외치고 있었다. "토착왜구 나경원은 사죄하라!"는 말도 들렸다. 일을 하며 그 장면을 보던 부부가 기분 나쁜 소리로 말을 주고받았다.

"대학생이란 것들이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저건 또 무슨 짓이래!"

이런 남편의 말에 안식구되는 분이 맞장구를 쳤다.

"어린 것들이 뭘 안다고!"

나는 못 들은 척할 수가 없었다.

"대학생들이 어린애들은 아닙니다. 단선적인 고정관념에 젖어 사는 노인들보다 젊은 세대들은 정보 영역이 넓고 신축성과 융통성 있는 사고방식을 갖고 삽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고민이나 변화에 대한 희망이 별로 필요 없기도 하고 그에 대한 책임도 질 수 없지만, 젊은 세대는 미래에 대한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어리다'는 관념은 옳지 않습니다. 민족지사 유관순 열사의 순국 당시 나이가 몇 살이었는지 아십니까? 열여섯이었습니다. 당시 만세 운동에 참여하여 고문을 당하거나 옥살이를 한 청소년 세대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그리고 4.19혁명도 어린 고등학생들과 청년 대학생들이 일으킨 위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내 말에 다행히도 그들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내 말을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다.

나는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면서도 인간의 편견과 고정관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새삼스레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업소의 좌석 위에 <조선일보>가 놓여 있는 것을 보자니 다시 내 몸에 소름이 끼쳤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충남 태안의 <태안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중앙보훈병원 #피우진 보훈처정 #빨갱이 타령 #복막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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