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식 중인 김영삼(1983년 5월)신군부의 강압에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김영삼은 1983년 5월 18일, 5.18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이하여 5.18영령들을 추모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벌인다.
김영삼 회고록
폭력으로 도득한 정권은 아무리 방비가 치밀해도 국민의 자발적인 동의가 없으면 허물어지게 마련이다.
전두환 정권은 학생ㆍ노동자들의 산발적인 저항을 공권력이라는 폭력으로 제압하면서 철옹성을 쌓아갔다. 광주학살과 조작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지켜보면서 국민들은 공포심을 어찌하기 어려웠다. 5공의 철옹성에 망치를 든 것은 김영삼이었다.
83년 5월 18일 전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서울 상도동 자택에서 단식에 들어갔다. 80년 5ㆍ17군사쿠데타에 의해 타의로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자택에 연금당한 지 3년 만에 단식을 결행한 것이다.
김영삼은 <단식에 즈음하여>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단식투쟁에 들어갔는데, 이 성명에서 "민주화투쟁을 더욱 굳건히 그리고 더욱 튼튼한 신념으로 해나가기 위하여 이번 단식을 하는만큼 나는 이 단식으로 민주화투쟁에 대한 나의 움직일 수 없는 결의를 나 자신과 국민에게 분명히 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5ㆍ18광주민주항쟁 3주년을 계기로 시작한 김영삼의 단식투쟁은 출범 3년을 맞은 제5공화국의 체제 내 정치권에 큰 파문을 던졌으며, 임시국회 소집문제를 비롯하여 제1야당 민한당의 진로문제와 특히 민주화추진협의회 결성의 계기를 만들었다.
김영삼은 단식에 앞서 5월 2일 발표한 <국민에게 드리는 글>에서 ① 구속인사의 전원석방 ② 전면해금 ③ 해직교수 및 근로자ㆍ제적학생의 복직ㆍ복교ㆍ복권 ④ 언론자유 ⑤ 개헌 및 국가보안법의 개폐 등 5개항을 요구한 바 있다.
김영삼의 단식과 관련, 5월 19일 전 신민당 소속의원, 재경지구당위원장, 지도위원 등 20여 명은 긴급 모임을 갖고 대책을 논의하여 '김영삼총재 단식대책위원회 6인소위'를 구성하고 국무총리의 면담을 요구키로 했다.
단식이 8일째 계속되던 5월 25일 오전, 노량진경찰서장과 정보과장 등이 상도동 자택을 찾아 김씨를 병원으로 이송할 것임을 통보하고 앰뷸런스에 태워 서울대병원에 강제 입원시켰다. 서울대병원으로 이송되고도 김영삼은 단식을 중단하지 않았다. 정부당국은 그의 건강상태가 악화된 시점인 5월 30일 김씨의 연금을 해제한다고 발표했다.
이날 김영삼은 김덕룡 비서실장을 통해 "연금의 해제는 지극히 당연하고 마땅한 조처이나 단식을 시작한 이유가 아니고 요구사항도 아니다"면서 <국민에게 드리는 글>에서 명시한 5개항의 민주화 요구를 정부당국이 받아들일 것을 거듭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