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클레이턴 포크George Clayton Foulk(1856-1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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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의문을 풀어줄 단서가 있다. 캐나다 출신이자 연세대 교수를 지낸 새뮤얼 홀리가 쓴 책 <조선의 미국 남자>(AMERICA'S MAN IN KOREA, 2008)에 실린 서신들이다. 다음은 1886년 2월 12일 조지 클레이턴 포크(1856~1893)라는 미 해군 중위가 조선에 머물 당시 부모님께 쓴 편지다.
"지금 저의 관직 생활이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여태까지 저는 정부에 순종해 왔지요. 정부의 지시들이 저의 양심과 정의에 어긋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셔먼호 사건을 처리하라는 지시를 받게 됐답니다. 셔먼호는 약 스무 해 전에 조선 사람들에 의해 파괴된 선박이랍니다. 승선자들은 모두 죽었고요. 그 배상을 조선 정부에 요구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런 요구가 옳은 일이라면, 옛날 인디언들이 미국인을 죽였다는 이유로 인디언 후손들에게 배상금을 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셔먼호가 결코 조선에 올 일이 아니었음을 우리 정부가 망각한 듯합니다. 셔먼호 사람들이 독단적으로 저지른 일이니 그 결과 또한 그들의 몫이겠지요.
이 일로 조선을 몰아세워야 하느냐 마느냐, 그것이 제가 여태껏 겪어본 적 없는 가장 당혹스러운 문제랍니다."
외교관들은 자신의 양심이나 가치관에 어긋나는 지시를 본국 정부로부터 받기도 할 것이다. 조지 포크는 그러한 상황에서 몹시 난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음을 이 편지에서 엿볼 수 있다.
조지 포크는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공적으로 처리했을까? 갈등 끝에 결국 정부의 방침에 순응하고 말았을까? 아니면 직을 걸고 항명이라도 했을까?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일어난 지 10여 년 후, 조선과 미국은 외교관계를 맺었고 1883년 서울에 미국 공사관이 들어섰다. 조지 포크가 인천 앞바다에 당도한 것은 그 다음 해 5월 31일이었다.
초대 주한 미국 공사인 푸트(Foote)가 1885년 초 이임한 뒤 미국 정부는 후임을 임명하지 않았다.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미 해군 대위인 유진초이(이병헌)가 본국의 지시로 주한 미 영사대리를 맡았듯이, 군인인 조지 포크는 주한 미 대리공사로 임명된다. 그리고 재임 기간에 본국 정부로부터 셔먼호 사건과 관련해 조선 정부에 피해보상을 요구하라는 훈령을 받는다. 사건이 발생한 지 20년이란 시간이 지난 뒤였다. 조선과 외교관계를 맺은 지는 3년 만이었다.
"조선인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조지 포크가 정부의 지시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알려면 그와 본국이 주고받은 문서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필자는 130년 전의 참고 자료를 찾았다. 1951년 조지 매큔과 존 해리슨이 출간한 <한미관계>(Korean-America Relations)라는 책에 수록돼 있었다.
1885년 7월 24일 국무부의 법무관 프란시스 워톤(Francis Wharton)은 국무장관 베이야드(T.F.Bayard)에게 아래와 같이 보고한다.
"본 배상 요구는 1866년 조선에서 발생한 제너럴셔먼호의 학살 사건에 따른 것입니다. (...) 사건에 대하여 여지것 외교적 행동이 취해지지 않았던 것은 비교적 최근까지 조선에 우리 외교관이 없었던 상황에 기인한 것입니다. 이제 포크씨가 대리공사로 주재하고 있는 만큼 관련 서류를 그에게 보내어 조사케 하고 조선 정부에 배상을 요구하는 것이 합당할 것으로 봅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인 7월 31일, 베이야드 국무장관은 조지 포크에게 공문을 보내 조선 정부에 배상을 청구하고 그 결과를 상세히 보고하라고 훈령을 내린다.
그는 "이 문제가 그동안 휴면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은 미국이 조선과 외교관계를 맺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라며 "제너럴셔먼호의 파괴로 인해 발생한 제반 손실과 상해, 승무원의 사망에 등에 대하여 조선 정부의 책임을 해제시켜준 일은 전혀 없다"라고 전제했다. 그러면서 "사건 발생 후에 시간이 경과했다고 해서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배상 청구의 유효성이 영향을 받을 수는 없다"라고 못박았다.
이에 조지 포크는 장문의 보고서를 보냄과 동시에 반론을 개진한다. 국무장관과 휘하의 외교관 사이에 예사롭지 않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조지 포크는 아래와 같은 요지로 본국 정부의 지시에 저항한다.
"셔먼호 도착 시기는 대원군의 전제적 권력 행사가 최고조에 이르고 있던 때였습니다. 기독교인이 박해의 표적이 됐습니다. 프랑스의 예수회 신부들을 포함한 많은 기독교인들이 처형됐습니다. 또한 수천 명의 비기독교인들도 기독교인으로 의심을 받아 처형당했습니다.
평양 일대에서 박해는 특히 심했기에 지역 전체가 흥분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프랑스 신부들의 죽음, 그리고 기독교 박해를 보복하기 위해 외국인들이 쳐들어올 거라는 불안감이 전국적으로 퍼져 있던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사정이 그러하다 보니, 셔먼호가 접근해 올 때 사람들은 한결같이 복수하러 온 것이라고 여겼으며 온갖 억측과 공포가 퍼졌습니다. 외국인에 대한 혐오감이 없는 사람들조차도 자기가 방관하고 있으면 외국인과 내통한 자로 지목돼 목이 달아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공격에 가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조선인들은 그러한 공포와 흥분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너나없이 셔먼호 파괴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상황을 근거로 조선인들을 변호하면서 배상 청구의 부당성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조지 포크, 그는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