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배씨가 5.18민주화운동 당시 사망한 아들 종철씨(당시 18세, 자개가구점 종업원) 사진을 가리키고 있다.
권우성
종철이네 가장은 엄마 이혜남씨였다. 아빠 김영배씨는 직장다운 직장을 다닌 적이 없었다. 광주 양동시장에서 엄마가 작은 주점을 하면서 번 돈으로 먹고 살았다. 아빠는 이것저것 사업에 손을 댔으나 수완이 모자랐던지 모두 실패했다.
궁핍한 살림살이는 바닥을 쳤다. 종철이 중학교 2학년을 다닐 무렵, 가세가 크게 기울었다. 엄마는 큰 수술을 하게 됐다. 모아둔 돈은 없고 수술비는 상당했다. 빚을 얻어 병원비를 충당했다. 돈을 벌던 엄마가 몸져눕자 가정 경제는 파탄 났다.
형은 학교를 그만두었다. 살림을 꾸려가려면 돈이 필요했다. 형은 고등학교 2학년 때 농공장으로 출근했다. 종철도 가까스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자개기술을 익히기 위해 가구공장에 취직했다.
자개공이던 종철은 공장을 옮겼다. 병아리 부화장에서 일하면 월급을 더 줬다. 거기서 먹고 자며 일했다. 집에 가는 건 한 달에 며칠뿐이었다.
80년 5월 18일, 종철은 쇠약해진 몸으로 집에 왔다. 다음날엔 몸이 나아졌는지 밖을 기웃거렸다. 점심 즈음 밖에서 돌아온 종철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부지, 큰일났습니다. 밖에 데모가 났는디 대학생들이 다 죽어갑니다."
아들은 방에 있지 못했다. 밖을 기웃거렸다. 오후 2시가 되니 잠깐 나갔다 온다고 했다. 아빠는 별일이야 있겠나 싶어 빨리 오라고 했다.
밤이 되어도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틀 밤이 지났다. 아빠는 덜컥 겁이 났다. 동네엔 계엄군이 사람들을 죽인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21일, 아빠는 아들을 찾아 나섰다. 친구 집을 수소문하고 광주 시내를 이 잡듯 뒤졌다. 시민군과 계엄군이 대치하는 월산동 잿등 근처, 화순 가는 길목에도 가봤지만 아들은 보이지 않았다.
'시민군' 김종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