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설 유허비
강소영
러시아로 여행을 떠난 지인의 사진을 보게 됐다. 사진에는 우수리스크 수이푼 강의 풍경이 담겨 있었다. 수이푼 강은 헤이그 특사인 이상설의 유해가 뿌려진 곳이다. 지인은 사진과 함께 그의 유언을 언급했다.
"나는 광복을 못 보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남김없이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마라."
이상설은 연해주에서 권업회를 조직하는 등 활동을 하다 1917년 사망한다. 수이푼강 인근에 이상설 유허비가 세워진 것은 2001년 일이다. 유허비란, 기록은 있으나 유물과 문화재가 없는 유허지 땅에 세운 비석을 가리킨다.
유허비에 새겨진 몇 줄 문장이 혼마저 타국에 두겠다고 한 그의 심정을 더듬게 한다. 광활한 땅에 홀로 세워진 유허비를 떠올리자니, 서툰 말로 내게 선조들의 역사를 들려준 고려인들이 떠오른다. 이상설 특사가 타국에서 눈감은 지 100년. 그의 혼이 남아있을 땅에서 온 이들을 만났다. 유허비와 그들은 닮았다.
조선에서 연해주로, 연해주에서 다시 중앙아시아로 거듭해 터전을 옮겨야 했던 러시아 한인들은 뿌리를 증명할 많은 것을 잃었다. 러시아 신분을 얻는 과정에서 성씨는 변형됐다. 김씨는 기가이가 되고 이씨는 니가이가 됐다. 강제이주 과정에서 족보는 사라졌다. 족보만 잃었나. 가족도 잃었다.
그렇게 살아온 흔적을 잃고 남은 것은 친척들이 들려준 이야기 몇 구절이다. 기억만 남았다. 기억을 간직한 이들을 만났다.
유허지에서 역사를 듣다
"우리 고조할아버지는 의병 지휘관이었어요. 고조할아버지가 사람들에게 앞서 싸우자 했어요. 다들 죽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래도 나갔어요. 잡혀서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 당했어요."
서툰 한국말이 의병, 지휘관, 형무소라는 단어 앞에서 멈춘다. 러시아어가 섞인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기가이 소피아는 허위 의병장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를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라 불렀다.
허위 의병장이 소속된 13도 창의군은 국내 최대 의병저항운동 세력이었다. 그는 의병을 모아 한양으로 진격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가 체포되어 사형당한 후 자녀들은 조선에 머물 수 없었다. 만주와 연해주로 도피한다. 기가이 소피아가 우즈베키스탄에서 나고 자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소피아가 해줄 수 있는 허위 의병장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어릴 적 할머니를 통해 들은 것이 전부라 했다. 기억을 더듬는다.
러시아에서 온 고려인 3~4세는 자신의 기억을 서툴고 짧은 문장으로 전했다. '일본군과 맞서 싸워 죽임을 당했다' '체포하려 하자 도망쳐 러시아로 왔다' 그 짧은 말들을 이어 붙이다보면 황량한 유허지에 서 있는 기분이 된다.
그럼에도 이들이 전해준 이야기는 많은 역사를 품고 있다.
앞서 언급한 이상설과 허위, 그리고 경제적으로 성공한 러시아 한인으로 항일운동조직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한 최재형, 봉오동·청산리 전투로 유명한 홍범도, 러시아 적백내전 시기 일본군이 소속된 백군에 맞서 싸운 대한의용군 소대장 마춘걸,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 세워진 한국 최초 사회주의 정당 '한인사회당' 탄생의 주역인 이동휘, 김알렉산드라. 이 외에도 이동녕, 이위종, 이범윤, 신채호, 장도빈… 무수하다. 그리고 역사에 이름을 새겨 넣지 않아도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할, 낯선 땅에서 땅을 일구고 삶을 개척한 사람들이 있다.
저마다의 이유로 연해주로 이주했고, 각자의 가치를 붙잡고 옳다고 믿는 일을 행했다. 살아남는 것이 목표인 이도, 죽음을 불사하는 이도 있었다. 머나먼 땅에서 살아갔다. 그리고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 수십 년, 아니 백년이 지나고서야 '고려인'이라는 이름을 달고 그 후손들이 한국 땅을 밟았다.
가깝고도 먼 사람들이 오다
"우리 고려시대 때 온 것 아니고 조선에서 왔다면서 왜 고려인이라 불리나요?"
어릴 적 한국에 온 고려인 3~4세들이 부모를 붙잡고 한 번은 물어보게 되는 질문이다. 구소련 영토에서 '카레이츠'라 불리던 시절에는 하지 않았을 질문이다. 그때는 '카레이츠'가 한국인이라는 말인 줄 알았다. 그러나 한국에 와서 알게 된다. '한국인'과 '고려인'은 다른 단어임을.
한국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에게 한국은 가깝고도 먼 나라다. 나에게도 이들은 멀고도 가까운 사람들이다. 생김새는 몹시 닮았는데 말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수십 년을 교류 없이 각자 다른 문화권에 살았다. 이들은 '닮음'을 보이겠다며 환갑잔치 사진 같은 것을 내밀었다. 차려입은 한복이 고왔다. 사진 속 낯설고도 익숙한 풍경에 오래 눈이 갔다.
기가이 소피아는 한국에 와서야 할아버지의 역사와 조우했다. 독립유공자 후손임을 인정받았다. 이곳에서 자녀를 키우며 살아갈 것이라 한다. 한국 땅에서 살기로 마음먹었으니 그녀와 나의 '닮음'은 많아질 것이다. '차이'를 확인하는 일도 잦아질 것이다. 그런데 우선은 알아가야겠다.
'독립운동기념비 건립을 위한 추진위' 결성을 알리는 자리에서 공동대표로 선 소피아가 이런 말을 했기 때문이다.
"한국인에게 고려인을 잊지 말라고 전하고 싶습니다."
잊지 않기 위해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