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턴(Trenton)호1883년~1884년 조지 포크와 한국인이 승선한 미해군 군함
미해군역사센터
그해 말 포크가 트렌턴호를 타고 조선을 향했을 때, 방미사절단인 민명익과 서광범, 변수도 동승했다. 민영익은 최초의 서양 여행을 하면서도 늘 중국 고전을 읽고 있었는데, 포크는 그 모습에 실망한다. 반면에 서광범과 변수는 불같은 호기심으로 미국의 문물을 관찰하고 배우려 해서 감동했다고 포크는 회상한다. 특히 서광범이 예사롭지 않은 인물임을 포크는 금방 알아보았다. 곧 두 사람은 마음을 통하는 친구가 됐다.
같은 배를 탔던 민영익과 서광범, 변수는 귀국 후 운명이 엇갈린다. 개화당이 혁명을 거사했을 때 일명 '급진개화파'인 서광범과 변수는 그 주동자였고, '온건개화파'인 민영익은 그들의 적이 돼 있었다.
사실 포크가 남도 여행길에 오르기 전, 서광범은 포크에게 종종 '수구파'를 제거하겠다는 뜻을 비쳤다. 포크는 과격한 방법은 좋지 않다며 만류했지만 그들은 기어코 거사를 일으키고 만 것이었다.
포크가 서울에 돌아와 보니 민명익은 우정국 낙성 축하 연회장에서 난자 당해 병상에 누워 있었고, 서광범과 변수는 망명을 하러 간 상황이었다. 갑신정변 주역들의 가족은 멸문지화를 당할 것이다. 포크의 절친 서광범이 남기고 간 가족들도 물론 멸문지화의 위기에 처했다.
이 대목에서 조지 포크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비화가 빛을 발한다. 포크가 고국에 보낸 편지에 의하면, 그는 극비리에 서광범의 가족을 도왔다. 출옥을 도왔을 뿐 아니라 생활비를 지원했다.
조지 포크는 서광범의 어머니에게 종종 달러를 건네면서 미국에서 아들이 보내온 것이라고 속였다. 포크가 그렇게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그가 자신의 부모님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다. 염치를 생명처럼 중시하는 양반들이어서, 만일 자신들이 적선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도저히 견디지 못할 것이라는 염려 때문이었다는 내용이다.
나중에 그의 편지를 자세히 살펴볼 것이지만, 이 일은 흉내 내기 어려운 일임이 틀림없다. 국사범의 가족을 외교관이 은밀히 돕는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드러나면 당장 추방될 것은 물론이고 분노한 민중으로부터 무슨 변을 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 마디로 위험천만하고도 무모한 모험이었다.
더구나 조지 포크는 당시 심한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었다(당시 미국은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그런 부강한 국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조지 포크는 조선인 친구에 대한 우정과 의리를 지켰다.
조선에 젊음 바친 비운의 주인공
조지 포크의 삶은 너무 짧았다. 미해군역사센터(Naval Historical Center)에는 그의 묘비 사진과 함께 짤막한 글이 실려 있다.
"교토 동부의 언덕에 있는 조지 포크의 무덤. 그는 37세를 앞두고 있던 1893년 8월 6일 숨을 거두었다. 조선에 젊음을 바쳤던 비운의 주인공이 여기 잠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