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나주박물관의 '길이길이 흥할 땅-장흥' 특별전. 장흥 보림사에서 보관하고 있는 월인석보 등 많은 유물이 전시되고 있다.
이돈삼
장흥은 역사적으로도 큰 고을이었다. 토착세력이 태조 왕건을 지지하면서 고려 때 중요한 정치세력이 됐다. 고려 인종의 비였던 공예태후(정안임씨)를 배출하면서 '장흥(長興)'이란 큰 이름을 받았다.
인종은 고려 제17대 왕으로 1122년부터 1146년까지 재위했다. 당초 이자겸의 두 딸을 왕비로 삼았지만, 이자겸의 난으로 폐비가 되면서 새로운 비를 맞는다. 그녀가 정안임씨 가문의 딸이었고, 인종의 부인(后妃)이 된다. 아들인 의종, 명종, 신종이 차례로 왕위에 오르면서 태후가 됐다.
'장흥'이란 지명이 여기서 유래됐다. 일반적으로 고려시대 군현(郡縣)의 승격은 규모나 행정의 필요성보다는, 나라에 공을 세운 인물에 대한 포상이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이뤄졌다. 장흥도 공예태후의 태 자리라는 이유로 정안현에서 장흥부로 승격됐다. 공예태후 정안임씨의 사적비가 장흥 천관산 아래 정안사에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