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9년 경안여자고등학교 3학년 제자들과 장혜옥 선생. 사진 제공_ 장혜옥
장혜옥
호헌 철폐, 독재 타도
1979년 박정희 사망에 이어 1980년 전두환이 광주에서 시민들을 학살한 뒤 정권을 잡았다. 장혜옥 선생은 시국에 대해 깊이 알지 못했다. 1986년 무렵, 안동 가톨릭교회에서 모임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곳에서 상영하는 광주 5·18 영상을 보게 됐다.
"아마 독일 기자가 촬영했다는 그 영상이었을 거예요. 그때부터 확 돌았죠."
장혜옥 선생은 잘못된 것을 보면 바로 고치려고 실천하는 성격이었다. 그 무렵 안동에서는 서너 명의 교사가 물밑에서 전교협(전국교사협의회) 활동을 하고 있었다. 장혜옥 선생은 망설임 없이 전교협에 가입한 뒤 활동하기 시작했다.
전두환 독재정권의 만행은 더욱 심해졌다. 1987년 1월 14일, 경찰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박종철을 고문·폭행으로 살해했다. 4월 13일, 전두환이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는 간접선거를 계속하겠다는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6월 9일, 연세대 이한열 군이 경찰의 직격 최루탄을 맞고 죽었다. 6월 10일, 전두환이 잠실체육관에서 노태우를 민정당 대통령후보로 지명(?)했다. 그날 오후,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 간접선거를 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짱돌을 던졌다. 6·10항쟁이었다.
"안동 시내에서도 시위가 일어났어요. 박종철 사건 터졌을 때 다들 리본 달고 학교에 출근하자 그러더라고요. 까만 리본이 없어서 치마 속 까만 안감을 찢어서 리본을 만들어 달고 갔거든요. 교무실 선생님들이 싸늘한 표정으로 쳐다보더라고요. 난 다 달고 왔을 줄 알았어요. 뗄 수가 없잖아요. 하루 종일 달고 있었죠. 그게 일종의 심리적 계기였던 거 같아요. 그때부터…."
1987년 6월 불어닥친 민주화운동 바람은 사학 민주화와 교육민주화 심지에 불씨를 댕긴다. 그해 9월 27일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 창립식이 열린다. 전교협은 창립 1년 만에 전국 평교사의 10%에 달하는 3만 명의 회원이 가입한다. 2년 뒤, 1989년 5월 28일 한양대를 원천 봉쇄한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지도부는 연세대학교, 조합원들은 건국대학교에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창립대회를 열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교사 노조는 불법이라고 규정하고 폭력으로 진압했지만 전교조 창립을 막지 못했다. 당시 문교부(장관 정원식)는 전교조 조합원을 해직하겠다고 공표했다.
"전교조까지 잘 넘어왔는데 넘어오자마자 탄압을 받기 시작했어요. 7·9대회라고, 그때 2천여 명이 여의도에 집결했다가 한 시간도 안 돼서 다 잡혀갔어요."
장혜옥 선생도 동료 교사 여섯 명과 같이 집회에 참석했다가 경찰서로 끌려갔다. 이틀 동안 잡혀 있어서 월요일에 학교를 가지 못했다.
"학교에서 난리가 났어요. 교사들이 정권의 탄압을 피부로 확 느낀 거죠. 화요일에 학교를 갔더니 전부 탈퇴하겠다고…. 탄압을 돌파하기 위해서 7·9대회가 열린 건데 '앗 뜨거라' 하면서 다 빠진 거죠. 열 명, 스무 명, 그다음 날 서른 명, 우르르 탈퇴 각서 써서 내는 거예요."
장혜옥 선생은 각서를 쓰지 않고 혼자 남았다. 학교 재단에서는 장혜옥 선생이 쫓겨날까 봐 오히려 걱정됐다. 실력 있고 인기 많은 교사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학교에서 각서를 쓰라고 회유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장혜옥 선생도 탈퇴각서를 냈다는 소문이 퍼졌다.
"'나 안 냈는데요?' 했더니 낸 걸로 돼 있다는 거예요. 추적하니까 정말 저를 아끼고 사랑하는 선배께서 '내가 책임진다'며 내 도장 갖고 가서 찍고 탈퇴 각서를 낸 거예요. 서랍에 도장 다 있으니까."
장 선생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다. 아무리 자신을 아낀다고 해도 그렇지, 자기 신념에 어긋나는 짓을 할 수가 있을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집에까지 가서 깽판 쳤죠. '나 이거 소송 건다. 사문서위조다.' 그 집안 발칵 뒤집어진 거예요. '당신이 왜 그런 짓을 하냐, 무슨 관계냐 둘이…'"
사태가 이상하게 돌아갔다. 결국 그 사람은 도장을 찍은 그 탈퇴 각서를 다시 빼 와서 장혜옥 선생에게 돌려줬다.
"그래서 무사히 해직됐죠."
장혜옥 선생은 해맑게 웃었다. 그때도 전교조 사무실에서 해직 통보서를 흔들면서 '무사히 해직됐다'며 웃었단다. 정말 행복해 보였다. 자기 삶은 자기가 끌고 가는 것, 당장은 힘들어도 그게 행복한 삶인지도 모른다.
해고될 당시 다니던 경안고등학교 학생들이 들고 일어섰다. '의기 충만한' 고등학교 1학년 남학생, 이들은 장혜옥 선생이 해고돼야 하는 까닭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학생들에게 장혜옥 선생님은 최고의 선생님이었다.
"남자애들한테 제가 오죽 인기가 많았겠어요. 제가 부임하고 애들이 놀랐던 게 '여선생님이 가르치는 거 처음 봤다', '웃으면서 수업하는 선생님 처음 봤다', '존댓말 쓰는 선생님 처음 봤다', '안 때리는 선생님 처음 봤다'는 거예요."
아이들이 장혜옥 선생을 따르는 건 너무 당연했다. 전교생이 수업을 거부하고 운동장에 나와 스크럼을 짜고 연좌시위를 했다. 이사장이 장혜옥 선생에게 아이들을 설득해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열 시에 운동장에 전부 나와서 아이들이 송사하고 제가 답사하고 그러고 보냈다는 거 아니에요. '얘들아 잘 있어라. 내 꼭 돌아올게.' 그랬는데도 내가 가르치던 아이들은 화가 나서 수업시간에 새로운 선생님 오셨는데 뒤돌아 앉기, 교과서 안 꺼내기, 쳐다보지 않기, 엎드려 있기, 이런 거 한 거예요. 그 선생님 얼마나 곤혹스러웠겠어요. 그 당시 전교조 흐름 다 알 텐데. 그분이 저희 집까지 찾아오셔서 읍소를 하시더라고, 너무 가슴 아프다고 눈물 흘리더라고요. 그래서 일일이 아이들 찾아다니면서 '얘들아, 그러지 말거라. 나 반드시 돌아온다.' 그리고 끝났죠."
전교조 활동
장혜옥 선생은 1990년에 안동지회에서 교육선전부장으로 1년을 활동하다가 경북지부 정책실장으로 가게 된다.
"경북지부가 대구에 있었어요. 안동에서 기차 타고 대구로 출퇴근했죠. 그때 독서 어마어마하게 했어요. 하루에 다섯 권? 정책실장이니까 정세 공부하느라."
1992년에 경북 출신 이영희 선생이 전교조위원장으로 선출됐다. 장혜옥 선생은 이영희 위원장 보좌관 격으로 본부로 올라갔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본부에 100명가량이 있었는데, 남자가 40명, 여자가 60명 정도였다. 그런데 위원장부터 국장까지 간부는 다 남자가 차지하고 있었다.
"나름 하나하나 보면 여자들도 다 서울에서 대학 다닌 잘난 사람들이고, 무슨 과에서 수석했던 사람도 있다 그러고, 여자들은 이렇게 똑똑하고 잘났는데 다 따까리만 하냐, 항의하고 그다음 위원장이 오셨을 때 여성 간부를 세우라고 막 싸웠죠. 본부에 탁아소 만들기 운동도 하고 조직 내 성평등주의를 주장하고 여성주의 운동을 했죠. 하다 보니까 미운털이 박히기도 하고, '장혜옥은 너무 정치적이야' 하는 꼬리표가 붙었죠. 여성들의 의지, 그것이 권력의지든 인정 욕구든 좋게 보지 않는 거죠."
장혜옥 선생은 여성할당제도를 만들고, 남녀 동반 출마 제도도 관철하려고 노력했다. 상근비는 따로 없었다. 후원자들이 보내 주는 활동비로 차비도 하고 생활비를 해야 했다.
"한 달에 18만 원 정도 가지고 살았죠. 전 혼자니까 살았는데… 그래도 저축한 돈 다 떨어지고 어떻게 하지? 이제 일 좀 해야 하나 할 때 복직하느냐 마느냐로 정부하고 교섭하게 됐어요."
이 글 앞부분에 밝힌 대로 전교조 탈퇴와 신규채용을 조건으로 복직하게 됐다. 전교조 교사들은 눈물을 머금고 복직 신청서를 썼다. 장혜옥 선생도 어쩔 수 없이 복직원을 썼다.
"희망 발령지를 쓰라고 하더라고요. 1지망 경안고, 2지망 경안고, 3지망 경안고를 썼는데…. 정말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