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어 자라는 나무 지척의 또 다른 회화나무. 같은 회화나무인데 자라는 모습은 전혀 다르다. 지척에서 같은 시대를 살아온 두 나무의 공통점은 둘 다 속이 새까맣게 썩고 비었다는 것이다. 첫번째 사진 속 나무다.
김현자
좀 더 설명하면, 사도세자가 갇힌 뒤주는 문정전과 그리 멀지 않은 금천 회화나무 인근 공터로 옮겨졌고, 결국 그곳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런 나무 가까이에는 궁궐 정문에 비해 규모가 매우 작고 소박한 문 하나가 있다. 선인문이다.
나무와 선인문은 가깝다. 몇 걸음 거리이다. 때문인지 선인문 또한 나무와 함께 사도세자의 비극을 목격했을 거라며 '사약을 받고 죽은 장희빈이 나간 문', '연산군이 도망친 문', '죽은 소현세자비가 가마니를 덮고 나간 문' 등과 같은 역사 사실들까지 아울러 이야기함으로써 선인문의 비극적인 면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현재의 '선인문은 1857년(철종 8)에 소실된 것을 고종 연간에 재건(창경궁 누리집)' 했다고 하니 당시의 선인문은 아닌 것이다. 선인문의 옛이름은 서린문(瑞燐門)이다. 세자가 거처하던 동궁(東宮) 정문으로 조정의 신하들이 출입하던 문이었다고. 원래의 선인문 규모는 훨씬 컸으나 재건 때 축소됐다고 한다. 인근에 궐내각사가 있었다는 안내문이 있다.
책에서 회화나무는 창덕궁 편에서 다룬다. 창덕궁 돈화문에서 금호문에 이르는 행각 인근에 천연기념물 제247호로 지정된 여덟 그루의 회화나무가 자라고 있어서다. 이 회화나무들 또한 창경궁의 회화나무들처럼 순조 연간에 제작된 <동궐도>(국보 제249호)에도 그려진 나무들로 모두 수령 300년 이상 추정한다(2014년 7월, 한 그루가 비바람에 쓰러졌다).
옛날, 안방마님이 거처하는 대청마루 한편에는 어김없이 다듬잇돌과 방망이가 있었다. 여자들은 홍두깨로 명주를 감아 다듬질하면서 시집살이의 고달픔을 달랬다. 빨래를 두들겨 빨 때 쓰는 방망이나 디딜방아의 방앗공이, 절굿공이, 얼레빗, 백성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나졸들의 육모방망이 등은 모두 박달나무를 깎아 만들었다. 도깨비를 쫓아내는 상상 속의 방망이,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범 안두희를 무명의 시민이 응징할 때 쓴 방망이도 역시 박달나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31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