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씨 가족 사진
박진
박진은 데모하다 경찰에 잡혀 들어가 고초를 당한 적이 있다.
"두 번 잡혔는데 한번은 범민족대회 서울대회에서 잡혔어요. 우리 부모님이 보수적이고 엄하셨거든요. 심지어는 오빠가 데모할까 봐 전 가족이 아버지 혼자 두고 서울로 이주할 정도로 데모를 싫어하셨는데 딸이 데모를 하니까… 마침 잡혀간 경찰서가 집 근처 강동경찰서더라고. 경찰 아저씨들이 저희 엄마 아빠를 불러서… 방학 때 한동안 가택 연금당하고 그랬죠. 싹싹 빌고 수원 학교 밑에 있던 자취방 빼고. 통학하기 힘들다고 핑계 댔지만 실제로는 데모하기 위해서 자취방을 구했던 거죠.
그 사건 뒤로 자취도 못하게 했는데, 그러다 빌어서 다시 자취하고 몰래 데모 나가고 그러다가 한 번 더 잡혀서… 한총련 출범식이었나? 제가 3학년 때 93년 한총련 출범식 준비위 출범식을 했던 기억이 나요. 그때 어머니가 너무 화가 나서 집을 나가셨어요. 일주일 동안 연락도 안 되고, 저는 정말 집안에서 죄인이 돼서 처음으로 아버지한테 맞았어요. 저희 아버지가 그 연배지만 자식들을 때리는 분이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한테 맞아 봤어요."
박진은 인생의 가장 큰 고난은 그때가 아니었나 회상한다.
"어머니가 제 침대에 칼을 꽂은 적이 있어요. 딱 꽂고 '죽자. 데모를 계속 할 거면 나하고 죽자.' 죽이라고, 그렇게 불효를 했다니까요. 내가."
결국 누가 옳았을까. 부모님은 지금도 여전히 자식을 걱정하지만 딸이 올바른 일을 한다는 걸 이젠 안다.
"심지어 대구 출신인 우리 어머니는 문빠가 됐어요. 제가 문 대통령을 욕하는 것도 싫어할 정도예요. 아버지는 제가 정치 학습을 많이 시켰죠. 이런 팟캐스트를 들어라, 이런 유튜브를 봐라. 저희 부모님들은 자식 사랑이 커서 자식이 잘되는 게 제일 중요한 일이에요. 지금은 많이 바뀌셔서 선거 때가 되면 저한테 물어요. 이번엔 누구를 찍어야 하냐, 어느 당을 찍어야 하냐? 물을 정도로…"
운동가로 살겠다
박진씨는 1995년에 대학을 졸업했다. 학생운동 출신들이 지역 활동이 막 시작되던 때였다. 박진씨는 수원사랑민주청년회라는 단체에 들어갔고, 작은 여행사에 취직했다. 청년회 활동을 열심히 했지만 늘 한구석이 부족했다.
"지역 활동을 제대로 하고 싶은데 전문성이 없으니까 한계가 있겠다 싶더라고요. 제가 법학과를 나왔으니까 전공을 살릴 수 있는 뭔가를 찾고 있었는데, 마침 그때 법무법인 다산에서 인권상담소 간사를 뽑는다고 하더라고요."
법무법인 다산은 1992년, 수원지방법원 근처에 김칠준 변호사와 김동균 변호사가 연 변호사 사무실이다. 두 사람은 인권 문제를 다루고자 변호사 사무실에 인권상담실을 열었다. 1996년에는 인권상담실을 인권상담소로 전환했고 아파트공동체 운동을 펼치고 수원인권영화제를 개최하면서 인권운동에 나선다.
"저는 1997년에 법무법인 다산에 간사로 들어왔죠. 그때는 다산 산하에 상담소가 있었고 상담소에서 다산으로 오는 노동 사건이나 인권 관련 사건들 소송을 같이 하는 구조였거든요. 인권 활동만 하는 게 아니라 실무자들이 법률사무소 사무장 역할을 했어요."
박진씨는 학교 다닐 때도 잘 하지 않았던 법률 공부를 그제서야 열심히 했다. 상담을 하려면 많은 걸 알아야 했다. 게다가 찾아오는 사람은 나이가 많은 남성 노동자분들인데 박진씨는 나이도 어렸다.
"그때 27살이었거든요. 근데 상담하러 찾아오는 분들은 나이가 많은 남성 노동자분들이에요. 말투에 나이 어린 여자를 우습게 본다고 생각되더라구요. 우습게 보이면 상담이 안 되니까 제가 무게를 잡고 아는 체해야 돼요."
박진씨는 갑자기 남성처럼 목소리를 낮게 깔고 "'오셨습니까?' 이래야 돼요"하면서 웃었다. 박진씨는 소송 실무는 별로 재미가 없었고 인권에 관심이 많았다.
"인권 영화제라든가 인권 교육 같은 별도의 사업을 하게 된 거죠. 인권 교육은 1998년부터 공부했고, 교육을 하기도 했어요. 인권운동사랑방에서 인권 교육팀도 만들고 워크숍도 많이 했거든요."
박진씨는 징계, 해고, 산재 사건, 민사소송 상담 등 일상적인 법률 상담을 했다. 큰 사건이라고 하면 그 당시 사망했던 수지 철거민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안기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던 김형찬 학생이 진술을 거부하다가 난로를 끌어안아 크게 다쳤던 사건, 안산 지역에서 있었던 대규모 해고 사건들도 박진씨가 상담을 하고 함께 싸웠다.
인권상담소는 1999년부터 전문적인 인권운동단체로 전환하는 길을 찾았다. 2000년 '다산인권센터'로 단체 이름을 변경하면서 자유권, 사회권 등 구체적인 인권 영역으로 활동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2002년에는 수평적 상임활동가 체제로 전환하면서 송원진, 박진, 송주현, 노영란씨가 상임활동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활동가들은 자기 사업을 하고 싶어하잖아요. 종속적인 직원 같은 관계, 이걸 좀 벗어나려고 서로 논의를 했어요. 그때 저는 시민단체 활동은 운동이라고 생각을 안 했어요. 그냥 좋은 일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인권운동을 한다는 생각으로 한 건 아니었어요."
박진씨는 1998년에 결혼했고 2000년에 아이를 낳았다. 한편으로 아이를 키우면서 상임활동가로 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동안 다산인권센터는 가정폭력 사건부터 노조 결성, 철거민 사망 사건, 애국동맹 사건, 이주노동자 경찰 가혹 수사 사건, 소년원에서 같은 원생한테 맞아 식물인간이 된 사건, 성동구치소 사망 사건, 국가보안법 사건, 살인 사건의 억울한 용의자까지, 지역의 숱한 인권 침해 사례에 대응하며 성과를 내 왔다.
2005년 무렵 삼성SDI에서 노조를 조직하려던 전현직 노동자 20여 명이 지난 2004년부터 불법 복제된 휴대폰으로 위치 추적을 당했다고 의혹을 제기하고, 그중 강재민씨는 사측 임원을 검찰에 고소했다. 강재민씨는 2004년 10월 3일 저녁 방영된 MBC <시사매거진 2580>에서 다른 노동자들이 고소를 취하한 배경에는 사측의 집요한 협박이 있었음을 증언했다.
당시 노영란 활동가가 '삼성 노동자 감시 공동대책위' 집행위원장 직책을 맡아 삼성 노동자들과 함께 싸우고 있었다.
"그 언니가 그때 갑상선암에 걸렸어요. 저희한테 너무 충격이었어요. 언니가 휴직에 들어가고 인권교육활동을 주로 하던 제가 그 활동을 이어받아 하게 된 거죠. 그래서 삼성 해고자 위치 추적 사건을 제가 맡게 된 거예요."
박진씨는 열의가 넘쳤다. 현장은 박진씨를 다시 살아나게 만들었다. 전국 삼성공장을 돌아다니는 원정 투쟁을 기획하고 안티삼성문화제를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열었다. 하지만 삼성의 권력은 강했다.
"삼성 위치 추적 범죄가 다 무혐의로 나왔어요. 결국 김갑수 아저씨는 해고 싸움에 졌고, 강재민씨는 회사에서 버티다 견디기 어려워져 그다음 해인가 회사 그만두었죠."
박진씨는 삼성과 투쟁하면서 다시 정신 차리고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성 투쟁 시작하면서 공부도 하러 다니고 평화운동가들이 비폭력 트레이닝을 받았어요."
그동안 독재정권에 항거했던 운동가들은 화염병을 던지거나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싸웠다. 그런데 모든 폭력에 반대하는 평화운동가들은 비폭력으로 목표를 쟁취하고자 했다. 경찰과 대치하게 될 때 어떤 식으로 저항할 것인지 트레이닝을 받기도 했다.
2006년에는 대추리에 미군기지를 확장한다고 농민을 내쫓기 시작했다. 문정현 신부, 박래군, 박진 등 수많은 인권운동가들, 시민들, 학생들이 대추리를 지켰다. 5월 4일, 행정대집행을 하는 날은 잊을 수가 없다.
"기자 회견 하고 나서 경찰들이 활동가들을 다 끌어내고 있었어요. '아, 저들이 이제 들어와서 우릴 뜯어내겠구나' 하는 순간, 초등학교 철문에 내가 이렇게 손을 넣고 걸었어요. 쟤네들이 내 팔을 자르지 않는 이상 행정대집행을 못할 거라는 판단이 들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