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유치준씨, 40년만에 부마민주항쟁 사망자로 첫 인정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및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5일 의결

등록 2019.09.05 16:02수정 2019.09.05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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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민주항쟁 당시 변사체로 발견되었던 고(故) 유치준(1928~1979)씨가 '부마민주항쟁 관련 사망자'로 공식 인정을 받았다.

국무총리실 소속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및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위원장 홍순권, 아래 위원회)는 5일 제54차 위원회의를 열어 고 유치준씨를 부마민주항쟁 관련 사망자로 의결하였다. 사망한 지 40년만이다.

유치준씨는 부마민주항쟁 당시 공사 현장 노동자로 있었고, 1979년 10월 19일 오전 5시경 경남 옛 마산시(현 창원시) 산호동 소재 새한자동차 앞 노상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부마민주항쟁특별법제정을 위한 경남연대'는 2011년 9월 1일 경남도청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부마항쟁 당시 마산에서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며 고 유치준씨를 처음으로 언급했다. 당시 기자회견에는 고인의 유족들도 참석하기도 했다.

고인의 유족들은 지난 2018년 6월 15일 위원회에 유치준씨를 '부마민주항쟁 관련 사망자'로 신고 접수하였다.

위원회는 고인의 사망과 관련하여 "그 사인이 물리적 타격에 의한 외상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고, "당시 시위가 고인의 퇴근시간 이후 사망 장소 인근에서 격렬하게 발생하였다"고 밝혔다.

또 위원회는 "경찰은 시신을 유족에 인도하였다고 담당검사에게 보고하였음에도 실제로는 시신을 유족에게 인도하지 아니한 채 암매장함으로써 사망 사실을 의도적으로 은폐하였다"며 "이런 점들을 종합하여 살펴볼 때 고인의 사망이 부마민주항쟁의 시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이 인정된다"고 했다.


고인의 사망경위에 대해, 위원회는 고인은 안면부에 외상을 입고 사망한 것으로 봤다.

1979년 부산지방검찰청 마산지청에서 작성한 <검시사건부>의 검시결과인 '뇌출혈사(지주막하출혈)'만으로는 사망의 원인을 특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당시 마산경찰서 출입기자가 경찰의 <변사발생보고서>를 입수하여 작성한 취재 자료에는 '왼쪽 눈 부위에 멍이 들고 퉁퉁 부어 있으며, 코와 입에서 피를 흘린 채 죽어 있음'이라고 발견 당시 변사체의 외양을 기재하고 있다.

위원회는 "법의학 자문결과 '검안으로 뇌출혈사 추정은 가능하나 해부학적 구조에 따른 출혈의 종류를 알 수 없기에 지주막하출혈이라고 결론내리기는 어렵고, 외양 상 변사자의 사망경위가 외력에 의한 것임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전문가의 판단을 종합하여 고인의 사망경위가 자발적 요인보다는 외부적 요인의 가능성이 크다고 본 것"이라고 했다.
  

1979년 10월 19일 오전 5시경 경남 옛 마산시(현 창원시) 산호동 소재 새한자동차 앞 노상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던 고 유치준씨가 부마민주항쟁 사망자로 인정되었다. 사진은 '부마민주항쟁특별법제정을 위한 경남연대'가 2011년 9월 1일 경남도청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었을 때 유치준씨의 아들이 고인의 사진을 들고 참석했을 때 모습. ⓒ 윤성효

 
'사망사실 은폐 여부'에 대해, 위원회는 "고인의 사망사실을 국가기관이 은폐하였다"고 판단하였다.

<검시사건부>에는 변사 담당 경찰이 사체 발견 당일(1979년 10월 19일)에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행려자'라고 담당 검사에게 보고하였다가, 다음 날(20일) '부검 결과 타살 혐의는 없으며, 신원 확인되어 시신을 유족에게 인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족은 고인의 시신을 1979년 10월 20일이 아닌 1979년 11월 초에 인도받았다고 주장했다.

위원회는 "조사 결과, 유족들이 고인의 행방을 찾는 과정에 대한 진술이 일관성있고, 동네주민들도 유족의 주장과 부합하는 진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가기관에서 사망사실을 은폐하였을 것이라는 유족의 진술에 신빙성이 있다"고 보았다.

또 위원회는 "군자료에 의하면 1979년 10월 19일 부산에서 개최된 '계엄업무 현지 간담회'에서 국방부차관과 문공부차관 등이 "계엄업무 수행 시 사상자가 발생할 경우 대외비로 하라는 것이 당시 국무회의에서 논의 사항이다고 발언한 사실이 확인된다"며 "시위진압 현장에는 사망자 처리와 관련한 지침이 하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도 판단의 근거로 삼았다"고 했다.

고인의 사망과 부마민주항쟁 연관성에 대해, 위원회는 "고인의 사망이 부마민주항쟁과 무관하게 발생하였다고 판단할 근거는 없다"고 결정하였다.

위원회는 "고인이 외력에 의해 사망하였을 가능성이 크고 사망사실을 경찰이 은폐한 사실을 확인하였다"며 "이러한 판단을 바탕으로 1979년 10월 18일 마산항쟁은 고인의 퇴근 무렵부터 자정까지 고인의 이동 경로 주변에서 격렬하게 발생하였고, 23시 이후부터는 39사단 군 병력까지 투입되어 시위를 진압하는 상황에서 10월 19일 새벽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고인이 부마민주항쟁과 무관하게 사망에 이르렀다고 볼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이번 인정의 의미에 대해, 위원회는 "유치준씨 사망 사건은 위원회에 접수된 부마민주항쟁 관련 피해사실 300여건 중 유일한 사망신고 건으로 유족과 관련단체뿐만 아니라 많은 국민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안이었다"고 했다.

위원회는 "그동안 유족과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등 관련 단체는 위원회에 국가가 공식적으로 고인을 부마민주항쟁 관련 사망자로 인정할 것을 요구해 왔다"고 설명했다.

홍순권 위원장은 "위원회의 이번 결정은 억압적인 유신체제에 항거하기 위해 일어선 부산 및 마산지역 시민들을 국가가 무력으로 진압하고자 공권력을 투입하는 상황 하에서 고인은 국가권력의 직·간접적 행위와 관련되어 사망하였다고 판단하고 이에 대한 국가책임을 인정한 것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했다.

홍 위원장은 "이를 통해 지난 40여 년 동안 고통을 겪었을 유족들이 고인의 사망 및 그 처리 과정에 대한 의문을 해소함과 동시에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 사이 부산과 마산(창원)에서 박정희 유신독재에 대항해 일어난 민주화운동을 말한다.
#부마민주항쟁 #유치준 #국무총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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