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35년 전 내가 쓴 '이난영 특종' 도둑맞았다"

윤재걸 "전남예총 회장이 '이난영 르포' 도작"... 임점호 회장, 사실 인정하고 뒤늦게 삭제

등록 2019.09.20 16:14수정 2019.09.20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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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중앙 > 1983년 12월호에 실린 윤재걸 기자의 이난영 르포 기사 ⓒ 윤재걸 제공


"1930년대 말 암울했던 시절에 혜성같이 나타나 가요사상 공전의 히트 넘버가 된 '목포의 눈물'을 불러 이 땅의 사람들을 울렸던 엘레지의 여왕 이난영, (중략) 그녀가 부른 노래만큼이나 눈물이 배인 그녀의 한 생을 추적해 본다."

임점호(67) 전남예총(사단법인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 전라남도지회) 회장이 지난 2013년 5월 지역 매체인 <목포시민신문>에 연재하기 시작한 '이난영 삶과 예술' 기고문 도입부다. 그러나 해당 글은 윤재걸(73) 전 한겨레신문 기자가 35년 전인 지난 1983년 <여성중앙> 12월호에 쓴 르포 기사를 그대로 베껴 쓴 글이었다.

전남예총 회장, '여성중앙' 기사 그대로 베껴 지역신문에 기고

임 회장은 목포신안예총 회장이던 지난 2013년 5월 24일부터 그해 10월 4일까지 약 5개월간 <목포시민신문>에 '임점호의 이난영 삶과 예술'이란 제목으로 15회에 걸쳐 기고했다. 임 회장은 당시 자신이 직접 쓴 글이라고 밝혔지만, 윤재걸 기자가 지난 1983년 <여성중앙>에 특종 보도 후 이듬해인 1984년 책으로 펴낸 이난영 르포 기사를 그대로 베껴 쓴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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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점호 전남예총 회장이 지난 2013년 5월 목포시민신문에 연재하기 시작한 ‘임점호의 이난영 삶과 예술’ 기고문. ⓒ 목포시민신문

 
임점호 회장도 20일 오전 <오마이뉴스> 전화 통화에서 윤 기자가 쓴 글을 베낀 사실을 인정했다. 당시 <목포시민신문> 인쇄판에 실렸던 임 회장 기고문은 6년이 지난 9월 20일 오전까지도 인터넷판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가수 이난영(1916~1965)은 일본강점기인 1930년대 '목포의 눈물'을 부른 전남 목포 출신 가수로, 친일 행적 논란에도 '이난영기념사업회'가 발족되고 매년 '난영가요제'가 열리는 등 목포를 상징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다. 임점호 회장은 지난 2004년 2월부터 목포신안예총회장을 4선 연임했고 지난 2월 임기 4년인 전남예총 12대 회장으로 선출됐다. 목포예총회장 시절엔 난영추모비를 건립하기도 했다.

<오마이뉴스>가 <여성중앙> 1983년 12월호에 실린 200자 원고지 160매 분량의 '이난영은 자살했다'는 제목의 글과 지난 1984년 5월 출판된 윤재걸 기자 르포집 <서울공화국 ; 윤재걸의 세상사는 이야기>(도서출판 나남) 원문과 임 회장이 목포시민신문에 연재한 기고문을 직접 비교했더니, 본문 내용은 물론 '슬픈 목소리만큼이나 처연한 여인' 같은 기사 소제목까지 거의 100% 일치했다. 지역신문 편집자가 최근 맞춤법에 맞게 교정한 걸로 보이는 일부 흔적 외 일치하지 않는 대목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윤재걸 기자는 지난 7월 임점호 회장과 목포시민신문 발행인을 저작권법 위반 공모 혐의로 광주지방검찰청 목포지청에 고소해 현재 수사가 진행 중이다. 저작권법에는 '저작재산권 그밖에 이 법에 따라 보호되는 재산적 권리를 복제, 배포, 2차적 저작물 작성 등의 방법으로 침해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이나 5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게 돼 있다.


윤재걸 기자 "문화예술인 권익 보호해야 할 예총 회장 행위, 용납 못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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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걸 기자의 이난영 르포 기사가 실렸던 <여성중앙> 1983년 12월호 표지(왼쪽)와 1984년 5월 출판된 윤재걸 기자 르포집 <서울공화국 ; 윤재걸의 세상사는 이야기>(도서출판 나남) ⓒ 윤재걸 제공

 
현재 전남 해남군에서 살고 있는 윤재걸 기자는 지난 19일 <오마이뉴스> 전화 통화에서 "지난 6월 지인을 통해 내가 쓴 이난영 르포 기사가 목포시민신문 인터넷판에 다른 사람이 쓴 글처럼 실려 있다는 걸 알고 황당했다"면서 "35년 전에 쓴 글이지만 당시 내가 쓴 책이 국내 주요 도서관에 입고돼 있었고 인터넷으로 '이난영'을 검색해 봐도 내가 쓴 글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도 임 회장 글을 확인 없이 실은 <목포시민신문>도 공모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1947년생인 윤재걸 기자는 1973년 <중앙일보>를 시작으로 <동아일보> <신동아>를 거쳐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위원으로 참여해 정치부 차장과 기획취재부장 등을 지냈다. 이난영 르포는 윤 기자가 지난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직후 해직된 뒤 1984년 복직하기 전까지 고 손목인·황문평 작곡가 등 지금은 고인이 된 이난영 주변 인물들을 직접 취재해 쓴 글이다. 1983년 여성중앙 12월호 표지와 목차에는 '여성중앙이 발굴한 국내 최초 추적특종 160매!! 이난영은 자살했다'라고 소개돼 있다.

임점호 회장은 20일 오후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2013년에 지역신문에 기고한 글은 윤재걸 기자가 1983년 <여성중앙> 12월호에 쓴 글을 베껴 쓴 게 맞다"며 도작 사실을 인정했다.

임 회장은 "2013년 당시 이난영 탄생 100주년 기념비를 준비하면서 <여성중앙>에 실린 윤재걸 기자 글을 보고 이렇게 좋은 글을 목포 시민들에게 알리고 싶었다"면서 "당시 윤재걸 기자를 몰랐고 <여성중앙>도 폐간된 상태라 발췌 허락도 받지 않고 내 이름으로 실은 것은 불찰"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임 회장 말과 달리 <여성중앙>은 2013년 5월 당시 계속 발행되고 있었고, 지난 2017년 12월호를 끝으로 무기한 휴간에 들어갔다. 

임 회장은 "지난 6월 말 윤재걸 기자에게 사과하려고 집까지 찾아갔지만 만나주지 않았다"면서 "지금이라도 기회를 준다면 직접 만나서 사과하고 싶다"고 말했다.

목포시민신문, 오마이뉴스 취재 직후 임 회장 기고문 삭제

하지만 임 회장이 도작한 글은 그때부터 3개월이 지난 20일 오전까지도 목포시민신문 인터넷판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에 임 회장은 "목포시민신문에 기사가 남아있다는 걸 몰랐다"면서 "오늘(20일) 오전에 삭제 요청했다"고 밝혔다.

목포시민신문 발행인인 류용철 대표도 이날 오전 <오마이뉴스>와의 전화 통화에서 "임점호 회장 기고 글이 윤재걸 기자 책을 도작했다는 얘기를 최근 들었지만 아직 도작 여부를 직접 확인하지 못했다"면서 "임 회장 본인이 삭제 요청을 하면 독자고충처리위원회를 열어 기사 삭제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류 대표는 "당시 도작 여부를 면밀히 확인하지 못한 건 미안하다"면서도 "2013년 당시 임 회장 쪽에서 먼저 기고를 요청했고, 당시 목포예총 회장은 지역 유력 인사여서 표절이나 도작 여부를 확인할 생각을 못 했다"며 공모 사실을 부인했다.

하지만 피해자인 윤재걸 기자는 이날 "내가 쓴 글을 신문에 실으면서 당사자 허락도 받지 않고, 자기가 쓴 것처럼 이름과 사진까지 넣은 건 명백한 글 도둑질"이라면서 "더구나 문화예술인 권익보호에 앞장서야 할 예총 회장이 그래서 되겠나,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며 법적 대응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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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시민신문은 오마이뉴스 취재 직후인 이날 오전 11시 30분쯤 “저작권 위반 ‘임점호의 이난영 삶과 예술’ 특별기고 삭제 결정”이라고 공지하고, 임점호 전남예총 회장이 쓴 글을 모두 삭제했다. ⓒ 목포시민신문

 
한편 <목포시민신문>은 <오마이뉴스> 취재 직후인 이날 오전 11시 30분쯤 "저작권 위반 '임점호의 이난영 삶과 예술' 특별기고 삭제 결정"이라고 공지한 후 임 회장이 쓴 글을 모두 삭제했다.

<목포시민신문>은 "지난 5일 본사 회의실에서 열린 독자 고충처리위원회 긴급회의에서 본사는 임점호 전 목포신안 예총회장이 기고한 이난영 삶과 예술을 다룬 글이 윤재걸 작가가 현재 폐간된 여성중앙에 게재한 이난영과 관련 된 글과 유사하다는 판단에 삭제키로 결정했다"면서 "임점호 전 회장은 6일 오전 10시 본사 인터넷 독자고충처리위원회에 윤재걸 작가의 글을 베낀 것으로 인정하고 특별기고 삭제를 요청했다"고 밝혔다. 다만 이날 오전에 삭제 요청했다는 임 회장 발언과는 시점에 차이가 있다.
#이난영 #전남예총 #임점호 #윤재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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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회부에서 팩트체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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