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이토 히로부미는 1905년 11월 15일부터 외교권 포기를 요구하면서 고종을 압박했다. 하지만 고종은 외면했다. 각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상태에서 분위기를 반전시킨 게 바로 이완용이다.
1905년 12월 16일자 <고종실록>에 정리된 바에 따르면, 이완용이 분위기를 전환시킨 시점은 11월 16일이다. 이날 고종은 각료들을 불러 대책회의를 열었다. 하지만 누구도 뾰족한 수를 내놓지 못했다. 고종이 괴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일단 미뤄보자"며 시간을 끌려고 했다. 이때 이완용의 한마디가 고종의 태도를 바꾸는 촉매제가 됐다. 이완용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일본 대사가 폐하를 뵙겠다고 청하고 있습니다. 만약 폐하의 마음이 단호해서 끝까지 흔들리지 않으신다면 나라를 위해 진실로 천만다행입니다. 하지만 만약 넓은 도량으로 부득이하게 허락하게 될 경우에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런 부분에 대해 미리 대책을 강구하셔야 합니다."
황제 당신이 끝까지 외교권을 지킬 수 있다면 천만다행이지만, 부득이하게 포기하게 될 경우는 어떻게 하겠느냐는 물음이었다. 끝까지 거부할 자신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속뜻은 '당신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고종의 태도 변화를 촉구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고종은 마음이 흔들렸다. 조약 체결 문제를 대신들에게 위임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를 동의의 표시로 간주했다. 그는 각료들을 모아 놓고 위협적 분위기를 연출했다. "황제가 당신들에게 위임한 것은 찬성한 것이니 마찬가지"라며 "빨리 결론을 내라"고 윽박질렀다. 그렇게 이완용을 비롯한 다섯 대신이 찬성을 표방하면서 을사늑약을 통과시켰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듯이 이완용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이토도 하지 못한 고종의 마음을 흔들어대는 역할을 그가 해냈다.
그런데도 <반일 종족주의>는 "이완용은 며칠 전 입각한 신참 학부대신에 불과했습니다"라며 이완용의 역할을 축소시킨다. 또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에 대한 비판은 <대한매일신보> 같은 당시 언론들의 오보에서 나왔다며, 이완용에 대한 비판을 거둘 것을 호소한다.
고종의 책임 있다고 해서 을사오적 책임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반일 종족주의>는 이완용의 매국행위를 서술한 <고종실록>이 제작된 경위도 고려하지 않고 있다. 실록은 군주가 죽은 뒤에 편찬된다. <고종실록>도 고종이 죽은 뒤인 1935년 완성됐다. 일본제국주의의 위력이 정점에 달했을 때 편찬됐던 것이다. 편찬한 기관은 일본 왕실(황실)의 감독을 받는 이왕직(조선왕실 사무처)이었다.
위에서 사료를 소개한 것처럼, 이왕직이 편찬한 <고종실록>은 을사늑약에 대한 이완용의 책임을 인정했다. 이런 사실을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이 근거도 없이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도 감안하지 않고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은 을사늑약 당시의 한국인들이 사실확인도 없이 을사오적만 비판하고 고종은 면책시켰다고 주장한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고종의 책임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당연히 있었다. 당시 최고의 논객인 최익현은 고종에게 제출한 상소문에서 "폐하께서 끝까지 반대하셨다면 저들이 군대를 배치하고 억지로 협박한다 해도 우리를 어떻게 하겠습니까"라며 고종을 비판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이 을사오적을 더 비판한 것은 이들이 고종을 부추겨 늑약 체결을 주도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왕조국가의 특성도 작용했다. 웬만한 사안이 아니면 군주를 비판하지 않는 게 상식이었기 때문에, 고종에 대한 비판이 더는 크게 부각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사람들이 고종의 책임을 몰라서 을사오적을 중점적으로 비판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황제 고종이 최고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해서 을사오적을 비판하지 않는다면, 아베 신조 총리를 지지하고 친일청산을 반대하는 '제2의 을사오적'이 출현하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이런 사정도 감안하지 않고 <반일 종족주의>는 "114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우리 한국인이 망국의 책임을 을사오적에 묻는다면, 그것은 심각한 정신문화의 지체를 의미합니다"라고 말한다. 을사오적에 대한 한국인들의 정서는 지체된 정신문화, 즉 후진적인 정신문화라는 것이다.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이 '정신문화의 지체'까지 거론하면서 을사오적을 감싸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을사오적이 매국노로 규정되면, 그들과 함께 대한제국 외교권을 강탈한 일본제국주의도 불의한 세력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일본제국주의가 한국을 위해 좋은 일을 했다'는 자신들의 주장이 근저에서부터 약해질 수밖에 없다. '일본의 식민지배가 옳았다'고 주장하려면 '그 전 단계에서부터 일본이 잘했다'고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낙성대경제연구소와 이승만학당이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을 위한 변호인단을 꾸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29
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