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주문화연구소는 9월 일 오후 진주교육지원청 강당에서 '진주 3.1운동 재조명' 학술대회를 열었다.
진주문화연구소
김희주 한국국제대학교 교수(교양학부)는 "진주 3·1운동과 지역사회운동"이란 발제를 통해 "1920년대 진주지역의 대중사회운동은 청년단체들이 선도했고, 핵심단체는 '진주청년회'였다"고 했다.
당시 진주청년회는 '진주사회의 개조(改造)'와 '수양(修養)'을 강조하며 문화계몽운동을 추진했고, 진주의 청년운동은 중앙의 정세와 지역 현안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진행되었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그는 "진주청년회가 1921년 4월 단행한 위원제로의 조직변경은 군 단위에서도 신속한 사례였다. 사회주의 이념도 속도감 있게 수용했고, 1925년 사회주의 청년조직들이 출현했다"며 "이들을 통합하여 1928년 1월 진주청년동맹이 결성됨으로 청년운동의 방향전환이 완결되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진주청년동맹은 통일적 청년운동을 전개하고, 선전·교양활동을 추진했으며 주민의 일상이익 옹호에도 충실했다"며 "이 단체의 사상과 성향에 주목한 당국의 압력도 가중되었다. 1929년부터 집중된 경찰의 탄압은 1930년 후반에 오면 일상적 활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극점에 이르게 된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김 교수는 "1931년 진주농민조합 청년부가 진주청년동맹을 흡수함에 따라 대중사회운동으로서의 청년운동은 종료되었다"며 "진주지역의 청년운동은 선도적이고 모범적이었다는 특징을 보인다. 청년운동이 배출한 인적 자원과 행동노선은 진주지역 사회운동의 기반이었다"고 했다.
진주지역 청년 활동과 관련해 그는 "제국주의 압제와 착취, 계급과 빈부의 격차가 없는 낙원을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1920년대 진주사회를 풍미했다"며 "그 핵심이 청년, 노동, 농민운동이었다. 일제의 탄압은 물론 후자에 집중되었다"고 했다.
이어 성패의 여부를 떠나 그들이 진주 땅에서 추구했던 가치와 열망, 그리고 희생은 100주년을 맞은 지금 다시 되새겨 볼 의미를 가진다"고 덧붙였다.
김형목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은 어린이와 여성을 중심으로 "진주 3·1운동과 사회적 약자"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소년운동은 3‧1운동 이후 실천적인 활동으로 전환되는 계기였다. 이전은 주로 잡지 발간 등 계몽적인 측면에 치중하였다. 소년‧소년한반도‧청년‧붉은저고리‧아이들보이‧새별 등은 주요한 잡지였다"며 "'어린이'라는 개념의 보편적인 사용과 어린이날 제정은 소년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했다.
'근우회 진주지회'에 대해 설명한 그는 "한국여성운동은 보편적 세계여성운동과 연계되어야 하되, 한국이 처한 특수한 상황 속에서 여성운동의 성격과 임무를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며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모든 분열정신을 극복하고 협동정신으로 공고한 단결을 여성의 의무라고 규정하였다"고 했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조미음 성균관대 사학과 겸임교수(진주 3‧1운동과 형평운동의 전국적 전개)와 박용국 남명학연구원 연구위원(진주 3·1운동의 영향과 성과에 관한 논평)에 대해 발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