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공농성을 하다가 찍은 셀카. 사진 제공- 김용희
김용희
폭행, 감금 그리고... 삼성 해고자 김용희
"어릴 땐 잘살았어요. 할아버지가 한의사였거든요. 고향인 무안에서는 꽤 부자였죠. 아버지는 경찰 간부였어요."
김용희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목포로 이사를 했다. 당시 정부는 영산강 하구를 막아 농경지를 만들었다. 김용희의 아버지는 10년 동안 경작을 하는 조건으로 논 2만 평을 분양받았고, 남은 돈으로 지하수개발 회사를 차렸다. 그때만 해도 그의 집안은 풍족했다.
김용희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박정희 독재정권의 실체를 알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학생운동을 했다. 그는 삼대독자라 군대 면제 대상자였지만 데모하다 잡혀 강제로 군대에 끌려갔다. 얼마 안 있어 5·18 광주항쟁이 일어났다.
"진압 작전이 완료되자 곧바로 의가사 제대했어요. 아마 삼대독자였기 때문일 거예요."
김용희는 1982년 3월에 한국교육개발원에 들어갔다. 강북 빈민촌과 강남 부자 동네를 오가며 유아교육 실태를 조사하는 일이었다. 석 달 다니고 있는데 1982년 6월에 삼성전자에서 근무하고 있는 친구가 놀러 오라고 했다.
"점심때 만났어요. 갔더니 너무 멋진 거라. 정문에서 안을 들여다보니까 나무들이 많고 잔디 위에서 책도 읽고 나무 그늘 밑에서 이야기 나누는 모습들이 부러웠어요."
김용희는 한국교육개발원을 그만두고 그해 12월, 창원공단에 있는 삼성항공에 입사한다. 꿈의 직장은 불행의 시작이었다.
그는 관리자로 입사해 품질 교육을 맡았다. 입사한 지 며칠 되지 않은 어느 날 비상계획부에서 오라고 했다.
"갔더니 계획부장이라는 사람이 욕부터 해요. '야, 이 새끼야. 왜 직장예비군 편성 카드를 제출 안 해?' 하는 거예요. 황당하잖아요."
김용희는 "아, 왜 욕부터 해?" 하고 항의를 하다가 직원에게 끌려나갔다. 알고 보니 계획부장이 당시 국방부 장관인지 하는 사람의 동생이라고 했다.
그때부터 회사에 밉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다음 해 또 회사에 항의할 일이 생겼다. 1983년 설날에 회사에서는 통근 버스로 직원들을 고향으로 보낸다.
"통근 버스가 36대 있었어요. 그런데 경상도 웬만한 데는 통근버스를 다 보내 주는데 전라도는 한 대도 없더라고. 너무 기가 막힌 거라."
김용희는 회사에 가서 따졌다.
"'경상도나 서울은 다 귀향 버스 주면서 전라도는 왜 한 대도 없냐' 그랬더니 인사부장이 열 받았는지 3600명 인사 카드를 저한테 집어 던지는 거예요. '전라도 한번 찾아봐라'하면서."
김용희는 오기가 나서 인사 기록 카드를 뒤졌다.
"아홉 명인가 나오더라고. 3600명 중에 아홉 명. 인사부장한테 그랬죠. '9명 가지고 버스 배차해 달라는 건 염치없는 짓이다. 하지만 버스표 정도는 구해 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했죠."
결국 회사는 전라도 쪽에 사는 노동자들에게는 귀향 버스 대신 표를 끊어줬다. 김용희는 그때부터 노동조합을 생각했다. 당시 삼성은 노조가 없고 노사협의회만 있었다. 노사협의회 위원은 간접선거로 30명 이상의 동의를 받아서 제출하면 된다. 어렵게 동의를 받고 노사협의회 위원이 됐다.
"그때부터 회사가 노골적으로 괴롭히는 거라. 인사과 애들 시켜서 싸움 붙이고 '전라도 새끼' 어쩌고저쩌고하면서. 화장실에서 싸움도 많이 했어요. 더 다니고 싶지 않더라고요."
김용희는 1984년부터 아내한테 죽어도 회사 다니기 싫다고 몇 번이나 얘기했다. 아내는 반대했다. '월급과 보너스가 많고 사원아파트 등 복지가 잘 돼 있는데 왜 그만두려고 하느냐'는 거였다. 김용희는 참다 참다 자살을 기도했다.
"제초제를 먹었는데 3일 만에 깨어났대요."
김용희는 치료를 받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참 바보다. 다시 살았으니까 뭔가 해야 되겠구나. 이 직장 문화를, 잘못된 구조를 바꿔 나가야 되겠다. 나 자신과 약속한 거죠. 그때부터 노사협의회 활동을 열심히 했죠."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일어났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끌어냈던 6월항쟁 이후 노동자들은 봇물 터지듯 노조를 설립했다. 울산에서 시작된 태풍은 마산과 창원으로 이어졌다. 부산·울산·경남지역 첫 노동자 조직인 마창노련(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이 탄생했다.(이는 나중에 민주노총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노조는 안 된다'는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의 유지에서 비롯된 삼성의 무노조 경영 기조는 굳건했다.
"1987년도부터 우리가 노조 만들려고 했는데 노조 설립 신고서를 가지고 시청에 가면 벌써 가짜노조를 다 만들어 놓았더라고요. 삼성 직원들이 아예 각 관공서에 상주를 해요."
김용희는 마창노련에 가입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단위사업장 노동조합으로 못 만드니까 삼성그룹 경남지역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했다. 이때 김용희는 추진본부장으로 추대를 받았다.
"그게 1990년 6월인데, 7월에 각목 테러당하고 12월에 과장, 부장한테 15일간 납치당했어요. 그리고 1991년 3월 1일에 조이라는 여자애가..."
너무 많은 사건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먼저 각목 테러 사건은 이렇다. 노조 활동에 관심 있는 직원들하고 술 한잔한 뒤 헤어졌는데 서른 중반쯤 되는 남자 다섯 명이 다가왔다. 이후 "이 개자식!" 하는 소리와 함께 정신을 잃었다.
"다음 날 눈뜨니까 창원동서병원 중환자실이었어요. 집사람이 옆에 있었고 머리가 깨질 듯 아팠어요. 누군가 풀숲에 소변보러 갔다가 쓰러져 있는 걸 보고 신고했대요. 20일 입원했었어요."
다시 회사로 나온 뒤 노조 설립 활동을 계속하자 어느 날 염 부장과 하 과장이 김용희를 차에 태워 대구에 있는 호텔 방으로 데려갔다. 그들은 김용희에게 노조 설립을 포기하라고 회유하고 협박했다. 그러나 그는 넘어가지 않았다.
"그다음 대흥사로 갔죠. 해남 대흥사. 거기서 하룻밤 자고 다시 광주로 갔어요. 광주에서도 모텔에서 숙박하며 지속해서 노조 설립 포기하라고 회유를 했어요. 안 되니까 목포로 데리고 가더라고요. '광주에다가 시계 대리점을 차려 주고 전셋집을 얻어주겠다. 보증금은 당연히 회사가 준다'고 제안을 해요."
김용희는 겨우 빠져나와 그다음 날 회사로 출근해 생산부 직원들에게 그동안의 납치 회유 사실을 폭로한다.
노동조합 총회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