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시민교류단' 회원들이 9월 19일 저녁 창원 정우상가 앞에 있는 '일제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참배하며 기무라 히데토(75)씨가 발언하고 있다.
윤성효
지난 9월 말 부산‧경남을 찾아 '평화기행'을 벌인 일본인은 "일본의 민주화, 전후 민주주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라는 물음을 던졌다.
기무라 히데토(75)씨는 "서정우 선생님의 고향을 찾아서"라는 제목의 기행문을 보내 왔다.
기무라씨 등 일행은 창원 강제징용노동자을 찾아 참배하고, 의령 서정우(1928~2001) 선생의 조상 묘소를 찾아 성묘와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서정우 선생은 1983년 '군함도 강제징용'을 첫 증언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일행은 의령 의병박물관 방문, 합천 원폭희생자 위령각, 거제 칠전량해전 현장, 부산 강제동원역사관, 부산시민공원 이수현 묘소 참배, 김해 봉하마을 노무현 대통령 묘소 참배를 했다.
기무라씨 등 일행의 이번 '평화기행'은 추도와 성묘가 계속된 것이다.
다음은 기무라씨가 보내 은 '기행문' 전문이다(일부 오타 등 수정).
서정우 선생님의 고향을 찾아서
9월은 태풍의 계절, 우리들의 <한국에 배우는 여행>은 태풍 때문에 이틀 발이 묶였다. 그런데 그런 비바람 속에서 버스를 타고 돌아다녔다. 버스는 창원겨레하나 공행식 대표가 운전했다. 태풍을 전혀 개의치 않고 우리들을 보살펴주셨다.
9월 21일, 태풍은 일본 가고시마현 서쪽에 파다를 지나가고 있었을 때 우리들은 거제도에 있는 포로수용소를 보고 있었다. 칠천량해전 기념 전망대에서 거제도의 앞바다를 보고 있었다. 의령 의병박물관도 본 후이니까 임진왜란을 생각하기에 좋은 장소였다.
"강제징용는 인권의 문제"라고 한 부산 강제동원역사관 학예부장은 "일본인의 전쟁 피해도 생각해야 한다"고 이야기해 주셨다. 그는 저에게 "강제동원을 인권이란 틀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처음으로 알려 주신 한국 사람이다.
예비답사 했을 때 청원에 있는 공립대안학교에서 <강제동원에 관한 수업>을 참관했다. 학교 규모가 크고 대안학교, 게다가 공립이라니 너무 놀랐다. 조선인의 강제연행뿐만 아니라 베트남 전쟁 때 한국군의 살육,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인의 종군 '위안부' 문제 등 전시 폭력과 인권 침해라는 관점에서 하는 수업에도 놀랐다. 학생들이 그룹별로, 과제된 문제에 대해서 그들의 의견을 발표했다. 그건 일본 대학에서 하는 '평화학' 수업처럼 느껴져 한국사회의 민주화가 얼마나 성숙하고 있는지 그 모습을 본 것 같다.
비바람이 거세지고 태풍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실감했다. 20일 합천에서 묵었을 때, 다음 날 일본에 돌아가는 날이었는데 어떻게 할까 상의했다. 회사에서 태풍 때문에 부산항은 폐쇄되어 이틀 동안 배가 나가지 않는다고 전화가 왔기 때문이다. 5명은 21일 오전 비행기 표를 예약하고 일정대로 돌아가기로 했다. 남은 사람이 어디로 갈까 고민했다. 합천 '평화의집' 관계자한테 어디 좋은 데가 없는지에 물어봤다. 그의 대답은 "태풍 속에서 어디도 가지 못해요"였다.
태풍 속에 창원으로 가는 길에, 창원겨레하나 사무국장이 "오늘 밤 사물놀이 공연이 있다. 가실래요?"라고 묻는 전화가 왔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있는데 누가 사물놀이를 듣기 위해 가는가? 그렇게 생각했다. 강행군으로 피곤할 건데도 참가자들은 누구도 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물어봤다. <아시아학>을 가르쳤던 모리카와 명예교수는 미소를 지면서 가고 싶다고 하셨다. 감격했다. 사실은 사물놀이는 좋아하지만 피곤도 하여 내 자신도 마음은 반반이었다. 비에 젖어서 좀 추웠다. 4명이 가고 싶다고 했다. 다른 참가자들을 숙소에 내려주고 다시 비속에 출발했다. 창원 성산아트홀은 큰 건물이었다, <가을 풍경>이라는 주제로 1987년 창립된 솟대패 사물놀이 예술단의 정기공연이었다. 팸플릿에서 단장은 이렇게 인사말을 시작하였다.
"꽃씨 한 톨이 모진 비바람을 견디며 싹을 틔우는 것은 꺾일 수 없는 삶에 대한 절실한 의지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한국 역사 안에서 고생해 온 민중의 마음을 이야기하는 음악이라고 생각했다. 한국말 중에서 제가 좋아하는 말은 '등신(等神)'이다. 어리석은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이라고 한다. 또 하나 '신(神)'자가 들어가는 말인 '신(神)나다'도 좋아한다. 어원적으로는 신과 관계없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한자 '신(神)'자가 들어가면 '신내림'이라는 인상을 갖게 된다. 보통 사람이나 보통 상황이 아닌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고 싶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바보 노무현>이란 별명이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자신을 바보라고 하는 지도자가 있었을까? 그는 "자신을 바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당장의 손익보다 멀리 보고 가치가 있는 것을 선택한 뿐이다"라고 말했다. <바보 노무현>을 자칭한 대통령이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의 자택 응접실에서는 <사람 사는 세상>이란 글의 액자가 있다. 일본의 젊은 정치가 야마모토 다로의 "살아 있어서 좋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회" 라는 말과 같은 울림이 있다. 야마모토도 바보 등신일까?
비속을 달려서 성산아트홀에 뛰어 들어갔다. 벌써 연주는 시작하고 있었다. 직원이 이 연주가 끝나면 들어가도 된다고 했다. 비속에서 달려왔는데, 낯에 산 무지개 우산도 강풍 때문에 날아갔는데, 그런데도 '기다려'라고. 한국 사람은 좀 더 융통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말을 주고받고 있는데 주최자가 와서 들어가게 되었다. 어둑한 홀에서는 많은 사람의 머리가 부대 조명에 의하여 실루엣으로 보였다. 태풍 속에서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국 전통 음악을 듣기 위해 왔다니, 이건 등신들이 아닌가 생각했다. 태풍을 개의치 않고 연주하는 사물놀이 음향에 압도당했다. 언제부터인지 사물놀이를 좋아하게 되었다. 처음에 너무나 시끄러운 음악이라고 생각했지만 요즘 그 동작, 음에 몸이 움직이다. 마치 미치광이처럼 장구를 치는 연주자에게 신나고 등신을 느낀다.
왜, 그렇게 세차게 치는 것일까? 폭풍 속에서 농락당하는 민중의 모습이 드러난다. 바보같이, 등신같이 외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상황이 드러난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 일본도 그런 상황에 다다르고 있지 않을까? 그래서 사물놀이에 끌리는 것일까? 꽹과리 소리가 높게 올라가자 고막이 터치는 것 같다. 상모돌리기. 거기서 늘어지는 하얀 줄('초리'라고 한다)이 빙빙 돌고 있다. 꽹과리 연주자는 치면서 마치 신체조 선수처럼 계속 몸을 반회전하면서 무대 위에서 돌고 있다. 길고 하얀 초리가 빙빙 돌고 훨훨 춤춘다. 초리의 움직임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보였다. 조상의 영혼이 연주자 주변에서 같이 신나게 놀고 있는 느낌이었다.
초리는 조상영혼인가. 생각하면 우리들의 평화 순례는 창원 강제징용 노동자 가족상 앞 추도에서 시작하여 의령 서정우(1928~2001, 1983년 군함도 강제징용 증언) 선생의 조상 성묘와 제사, 임진왜란 때 싸웠던 곽재우 장군과 백성들의 의병박물관 방문, 합천 원폭희생자의 위령각, 거제도 정유재란 칠전량 해전에서 돌아가신 조선 병사들 추도, 부산 강제동원역사관에서의 희생자에 대한 전시, 부산시민공원에 있는 이수현 학생 묘의 성묘, 봉하마을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묘소 참배까지. 우리는 추도와 성묘를 계속 하게 되었다.
우리들의 평화기행은 역사 속에서 고생하면서 돌아가신 민중들의 모습을 찾아가는 여행이었다. 그래서 태풍 속에서 본 사물놀이에 조상들의 영혼을 보게 된 것인지 모른다. 한국을 여행하면서 이런 일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일본과 한국의 경계가 머리 속에서 없어진 것 같다.
수년전 일본 언론계는 일제시대에 있었던 '대본영 육해군부 발표'(大本営陸海軍部発表)가 되었다. 요즘에 파시즘 앞잡이 하는 언론이 많아졌다. 자신이 살아있는 시대에 파시즘을 다시 경험한다고 생각도 못했다. "살아 있어서 좋다고 생각할 수 있은 사회"라는 표현은 너무나 무거운 말이다. 당연한 일인데 지금 이런 말을 외쳐야하는 세상이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도 필사적인 마음을 느낀다. 전후 가난했지만 평화로운 세상이 온다고 생각했다. 평화롭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막연한 희망이 있었다. 힘들었지만 자신들 존재를 시인(是認)할 수 있는 자부심도 있었다. 그것이 없어지고 위태로워지기 시작한지도 모르다.
노무현 대통령의 묘비에는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라고 써 있다. 부산에서 민주화운동의 선두에 선 변호사는 대통령까지 올랐다. 한국에서 지금도 민주화, 민주주의의 싸움이 계속하고 있는 것 같다. 일본의 민주화, 전후 민주주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이번 여행은 자신에게 물어봐야 하는 것을 깨달은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