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 징병된 이들이 신체검사를 받고 있는 가운데, 신체검사장을 찾은 조선군사령관.
임현철
정안기 연구원은 충분한 근거도 없이 일본군 입대의 자발성을 주장하면서도, 한 단계 더 나아가 일본제국주의의 입영 정책을 찬미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제1단계를 제대로 마무리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제2단계로 성급히 나아간 것이다.
그는 일본제국주의가 일본군에 입대하는 일본인과 식민지 한국인을 차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한국인 징병을 위해 거액의 재정 지출까지 감내했다고 말한다. '자발적'으로 입대한 한국인들을 위해 일본이 좋은 일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징병을 하면서 돈을 쓰지 않는 정부가 어디 있을까. 사실 그 돈은 식민지 한국에서 거둔 돈이다. 그런 돈인 줄 알면서도, 정안기 연구원은 일본이 한국인 징병을 위해 거액을 지출한 점까지 굳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일본제국주의가 이렇게까지 해준 것은 일본인과 식민지 한국인 사이의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이 대목이 <반일 종족주의>에 이렇게 서술돼 있다.
"일본이 거액의 재정 지출을 감수하면서까지 육군특별지원병제를 시행하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일본은 육군특별지원병제가 조선인의 황민화를 위한 정신적 기반을 확충하는 동시에 아시아에서 일본의 사명을 이해시키고, 천황제 국가 일본에 대한 충성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크게 유용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육군특별지원병제를 통해서 동화주의 식민통치 이데올로기의 제도적 완성을 추구했습니다."
일본이 강제징병을 실시한 것은 일본 국민들만으로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중국뿐 아니라 동남아와 태평양, 심지어는 영국과 미국을 상대로도 전쟁을 일으켰다. 군국주의 야망에 불타서 시작한 일이, 어느 순간 감당하기 힘든 세계적 규모의 침략전쟁으로 발전돼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버티는 길은 군인 숫자를 하나라도 더 늘리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식민지 한국인들을 일본군에 편입시켰던 것이다. 일본인과 식민지 한국인 사이의 차별을 없애주기 위해서 그렇게 했던 게 결코 아니다. 그런데도 <반일 종족주의>는 일본제국주의의 의도를 순수하게 포장해주고 있는 것이다.
<반일 종족주의>는 그 같은 일본의 의도가 훌륭한 성과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일본군에 들어간 한국인들이 군대 안에서 평등을 맛보고 근대적 인간이 될 기회를 얻었다는 것이다. "육군특별지원병은 이들에게 향촌 사회의 신분 차별로부터 탈출이나 입신 출세의 지름길이었습니다"라고 정안기 연구원은 말한다. 또 이렇게 강조한다.
"육군병지원자 훈련소는 몸과 마음으로 충군애국을 실천하는 병영 생활의 복사판이자 비(非)국민을 국민으로 포섭·개조하는 국민 만들기의 공장이었습니다."
비국민이었던 식민지 주민들이 일본 육군이 되어 비로소 국민으로 승격됐다는 것이다. 이들을 완전한 자기 국민으로 개조하기 위해 일본이 만든 공장이 바로 군대였다는 것이다.
정안기 연구원은 육군특별지원병과 마찬가지로 학도지원병도 그 같은 차별 해소에 기여했다고 말한다. "일본 정부의 입장에서 조선인의 학도 지원은 동일한 제국신민에 대한 국민의무의 차별 또는 역차별을 해소하기 위한 고육지책이기도 했습니다"라고 말한다. 민족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일본이 고육지책으로 어렵사리 내놓은 제도가 학도지원병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든지 간에 군대는 여타 분야에 비해 평등한 측면이 많다. 부하와 상관 사이의 위계질서는 엄격하지만, 적어도 같은 계급에서는 분명히 평등이 존재한다. 대단한 고위층 자제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군인들은 학력·재산·지위에 관계없이 무차별적 대우를 받는다. 학력이나 재산 혹은 지위가 낮아도 군대 안에서는 계급에 따라 대우를 받는다.
또 여타 분야에 비해, 군대에서는 실력주의가 강하게 작용한다. 혈통이나 신분도 중요할 때가 있지만, 훈련이나 실전 같은 때는 실력이 가장 강하게 작용한다.
평양성에서 구걸하며 살았던 온달이 고구려 장군으로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은 평강공주가 갖고 간 재산 덕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전국 사냥대회에서 1등을 하고 군대 선봉장이 되어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온달이 역사적 인물로 부각된 데는 군대에서 보여준 실력이 결정적이었다. 가야왕족 출신인 김유신이 신라 사회에서 출세할 수 있었던 것도, 화랑이 되고 군인이 되어 전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비교적 평등하고 실력주의가 작동하는 군대라는 공간이 아니었다면, 온달과 김유신이 그처럼 대단한 인물이 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지 않은 채, 정안기 연구원은 군대 내의 평등이 일본제국주의 안에서만 있었던 것처럼 말한다. 그는 식민지 한국의 향촌사회에 존재했던 소작인 아들과 지주 아들 사이의 차별 같은 것이 일본군 내에서는 없었음을 높이 평가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군대는 원래 다 그런 법인데도, 그는 그게 일본군 안에서만 가능했던 것처럼 말하고 있다.
강제징병은 스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