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하늘에서 본 독도.
국회사진취재단
이영훈 교수는 동일한 논법을 백두산에도 적용한다. 백두산이 한국인들의 머릿속에 자리를 잡은 게 그리 오래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백두산에 대한 애착이 생긴 게 오래전이 아니므로 백두산을 중심으로 민족주의를 형성하는 것은 역사적 근거가 별로 없다는 메시지를 던지고자 하는 것이다.
백두산에 관한 그의 이야기는, 13년 전인 2006년 2월 기무라 미쓰히코 아오야마가쿠인대학 교수 등 26명과 함께 쓴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에도 등장한다. 그는 이 책 맨 앞에 백두산 이야기를 배치했다. 그만큼 비중 있게 취급한 것이다. 이때 쓴 글을 최근 상황에 맞춰 <반일 종족주의> 제12장 '백두산 신화의 내막'에 편입시켰다.
<반일 종족주의>에서 이영훈 교수는 '백두산이 민족의 영산'이라는 관념은 20세기에 와서야 형성됐다면서, 조선시대까지는 백두산을 신성시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백두산이 민족의 영산으로 바뀌는 것은 식민지기의 일입니다"라는 것이다.
그가 제시한 근거 중 하나는 조선 후기 문신인 서명응(1716~1787년)의 이야기다. 1700년대의 저명한 지식인인 서명응의 글에 나오는 백두산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백두산'이 아니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백두산을 바라보는 옛날 사람들의 인식이 오늘날과 달랐음을 강조하고자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반일 종족주의>에서 이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조선왕조 1776년의 일입니다.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낸 서명응이 백두산에 올랐습니다. 그는 한동안 정상의 경관에 취해 있다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직 이 하늘 아래의 큰 연못에 이름이 없는 것은 나로 하여금 이름을 짓게 하고자 함이 아닌가' 그러고선 태일택(太一澤)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태(太)는 태극을, 일(一)은 '삼라만상은 하나'라는 뜻입니다. 서명응은 당대의 최고 성리학자답게 뻥 뚫린 화산의 분화구와 그에 담긴 물을 보고 만물이 태극에서 솟았다는 성리학의 원리를 연상하였습니다."
서명응이 오늘날의 천지에 대해 태일택이라는 성리학적 명칭을 부여한 점을 근거로, 이영훈 교수는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백두산은 성리학적 관념이 투영된 대상이었을 뿐, 민족의 영산으로 신성시되는 대상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당시의 백두산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백두산과 전혀 다른 의미를 띠고 있었다는 것이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뭉쳐지는 '종족주의'를 높이 평가할 필요가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이다.
일제와 상호작용 과정에서 백두산이 민족의 영산으로 부각?
하지만 서명응은 백두산을 성리학적 관점으로만 인식하지 않았다. 그 역시 백두산을 신성시했다. 그 증거가 서명응 문집 <보만재집>에 담긴 '유(遊)백두산기'에 분명히 나타난다.
태일택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하루 전날, 서명응은 동행한 관료 및 군인들과 함께 백두산에 제사를 올렸다. 백두산을 무사히 볼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하는 제사였다.
산에 제를 올리는 것은 성리학적 자세가 아니다. 이런 산신 숭배는 우리 민족의 전통 신앙이다. 이것부터가 서명응이 백두산을 성리학 관점으로만 바라본 게 아님을 증명한다.
제사를 지내기 전, 갑산부사가 제문을 준비했다. '백두산 유람기'로 번역되는 <유백두산기> 속의 그 제문을 읽어보면, 당시 사람들이 백두산을 어떻게 봤는지 알 수 있다. 제문 첫머리에 이런 말이 있다.
"우뚝 솟은 백두산이 우리 땅에 계시니, 땅 아래 사람들이 우러러보며 그 전모를 보고자 합니다. 이번에 온 것은 참으로 하늘이 편의를 베풀어주신 덕입니다. 풍찬노숙한 것이 거의 삼천리나 됩니다. 산에 신령이 계시니, 저희의 성의를 살펴주실 것입니다. 구름과 안개를 거두시고 장엄한 모습을 보여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