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즈키 스미에 씨가 일본어로 번역하고 있는 책, 《풀》(김금숙, 보리출판사, 2017).
안건모
스미에 씨는 남자 친구를 만나기 전에는 자신에게 조선인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이 한편으로 부끄럽기도 했고 여느 일본인과 다르다는 의식에 사로잡혀 있기도 했다.
"여름에 만나서 가을에 동거하고 봄에 결혼했어요. 하하하! 3학년 때. 우리 남편 재미있는 사람인데 그때 데이트할 때 학습(만 했어요). 공원 벤치에 둘이 앉아서 '마르크스 레닌이 이런 말 했다, 마오쩌둥이 이런 말 했다.' 남편은 그런 영향 많이 받았던 사람이에요."
남편과 연애할 때 마르크스, 레닌 사상과 사회과학, 시국 이야기만 주고받았다는 말이다.
"내가 조선인 할머니 이야기하면 남편이 '차별이라는 문제는 개인 문제가 아니다, 사회구조 문제'라고 설명해 줬어요. 그래서 '네가 창피해 할 필요가 없다. 당당해라.' 그때부터 내 안에 있던 가치관이 180도 바뀌었어요. 그렇구나, 창피할 필요 없다 깨달았어요."
남편 덕분에 스미에 씨는 열등한 민족은 없다는 가치관을 갖게 된다. 그리고 스미에 씨는 인권과 평화, 환경에 관심을 쏟게 된다. 그 무렵 일본은 환경 문제가 가장 심각했다.
1960년대부터 고도 성장기에 들어선 일본은 1970년대는 대기오염과 공해 문제가 심각했다. 유기(有機) 수은 중독에 의한 만성 신경 질환인 미나마타병, 카드뮴이 뼈에 축적되어 발생하는 공해병 이타이이타이병, 만성 비소 중독증 등 여러 가지 공해병이 발생했다. 자연스레 스미에 씨는 환경운동에 전념했다. 모리나가 비소 중독 피해자와 연대하는 활동도 했다. 후쿠야마시에 새로 건설되는 화력발전소 저지 운동도 치열하게 했다.
"만약 화력발전소가 생기면 발전소에서 온폐수가 바다로 흘러요. 바다 해수 온도가 높아질 거예요. 거기에 그 당시 김 양식이 많이 있었고, 만약 해수 온도가 높아지면 피해가 많다고 해서 어민들과 학생, 노동조합원, 시민들이 같이 단결하고 지방 행정부에 저항 운동 했어요. 전단지를 등사기로 밀고 바닷가까지 한 시간 이상 자전거를 타고 어부들 집에 하나하나 나눠 주는 그런 일도 했어요. 저항하는 사이에 계획이 미뤄지게 되고 경제 상황이 나빠져서 그 건설 계획이 취소됐어요."
스미에 씨는 인권운동에도 뛰어들었다. 가장 먼저 '부라쿠해방운동'에 발벗고 나섰다. '부라쿠'라는 말은 마을이라는 뜻의 '부락'이라는 일본 말이다. 부락은 일본에서 특수 천민이 집단으로 살던 곳을 '부라쿠'라고 한 데서 연유했다. 부락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천한 신분 취급을 받았다. 한마디로 우리나라 조선시대 때 '백정'과 똑같은 존재였다.
"에도시대에 무사 계급이 자기 지배 계급을 안정시키려고 농민 밑에 천민 같은 신분제를 만들어서 농민들이 세금을 많이 빼앗겨도 '더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 가난은 할 수 없다'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분열 지배하기 위해서 만든 계급이 부라쿠예요. 메이지 시대가 돼도 그런 사람들이 계속 사회적인 차별, 경제적인 차별을 받아서 일본 사회 속에서 희생하는 계급, 그런 존재였어요. 그런 사람들이 인간으로서 차별을 스스로 없애려고 운동 조직을 만들어서 일본 부라쿠해방운동, 그 운동을 수평운동이라고 했는데 1920년대 조선의 형평사와 연대했대요."
*형평사운동(衡平社運動)이란 조선에서 1923년부터 일어난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을 말한다.
1975년 3월 스미에 씨는 대학을 졸업한다. 그리고 부라쿠민들이 사는 마을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부라쿠해방운동을 이어 간다. 부라쿠에 살고 있는 아이들과 함께 놀기도 하고 공부도 가르치면서 시의 차별 정책에 저항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월급은 적었어요. 적었지만 그땐 너무 젊어서 그런 인권운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하겠다, 하겠다. 하하하."
스미에 씨는 4년 동안 부라쿠해방운동을 한다. 그 4년은 자기 인생에서 가장 밀도 있는 기간이었다고 회상한다.
"내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경험 많이 받았어요. 부라쿠 사람들도 일본의 조선 사람들과 같은 경험이 있었고 자기가 부라쿠 사람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이 드물었어요.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과 고향을 숨겨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런데 운동을 계속 하면서 자기 책임이 아니다, 사회구조 문제다, 오히려 그렇게 가난한 상황에서 인간답게 살아오는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중요하다, 그런 사람이 점점 늘어났어요. 사람들이 갈등 많이 했어요. 내가 한 갈등과 비슷한 갈등. 그래서 내가 거기에서 아이들의 여러 가지 공부 가르쳤는데 학교 공부뿐만 아니라 부라쿠의 역사라든가 그런 것도 가르쳤어요."
대개 부라쿠 어르신들은 차별 때문에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그리고 저학력과 차별 때문에 일반적인 직장에 취직하기가 어려워서 불안정한 직업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악순환이었다. 마차에서 물건을 팔거나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부라쿠해방운동 활동가들은 시에다 이들의 안정적인 직업도 요구했다. 비록 쓰레기 회수하는 일이지만 지방정부 직원이 된 사람도 있을 정도로 어느 정도 효과를 보기도 했다.
스미에 씨는 4년 만에 그 지역에서 나온다.
"계속 일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해방운동 안에서 여러 가지 이론이 대립했어요. 그런 영향 받아서 일단 교육 사업을 중지했어요."
그 무렵 스미에 씨는 아이가 둘 있었다. 아이들을 보육소에 맡기고 통신제 고등학교 임시 교사를 했다.
"집에서 리포트를 하거나 일주일에 한 번,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한 번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제도가 있었어요. 그곳을 다녔을 때도 너무너무 귀중한 시간을 보내고 감동을 받았어요. 그다음에 정규직 교사가 됐어요."
금방 교사가 된 듯 말했지만 교사 자격증을 따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체육교사 시험이었는데 1차는 합격했는데 2차에서 떨어졌다. 두 번이나 떨어졌는데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내 사상 행동이 정부에 들어가 있어서... '해방운동한 사람이야. 안 된다!' 하하하! 세 번째 합격했어요."
당시 일본 사회는 사상 검증이 일상화할 정도로 우익이 판치는 사회였다. 그런데 결국 합격한 이유가 뭘까. 궁금해서 집요하게 물었더니 스미에 씨는 잠깐 망설이다가 주먹을 불끈 쥐면서 "아마 실력이 있었기 때문에?" 하고 호탕하게 웃는다.
스미에 씨는 그 뒤부터 줄곧 체육교사로 일한다. 그러나 체육만 가르친 게 아니었다. 스미에 씨는 늘 인간에 대한 사랑이 관심사였다. 그것은 아마 외할머니, 어머니가 살면서 받았던 차별대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일본 중학교에서는 일주일에 서너 시간 특별한 교육부 커리큘럼이 있어요. 과목 상관없이 사회문제라든가 평화, 인간관계, 그런 것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요즘은 조금 제도가 바뀐 게 있는데 (그때는) 그런 게 시간표에 있었어요."
스미에 씨가 교사로 있던 학교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원폭 피해를 입었던 히로시마에 있었다. 의식 있는 활동가들이 평화 문제에 가장 관심을 두는 것은 당연했다.
"전쟁 때 히로시마에는 그런 피해가 많았다, 전쟁은 안 된다, 평화가 좋다, 그런 식의 평화교육을 했어요. 그런데 내가 어렸을 때부터 받은 차별 문제라든가 학생 때 부라쿠해방운동 등 여러 가지 공부하면서 차별 문제는 피해자 문제뿐만이 아니라 가해자 문제도 같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히로시마는 피해 지역일 뿐만 아니라 히로시마가 아시아에 대한 가해, 침략 거점이었다, 군대가 거기 있었어요. 그런 가해 역사도 우리가 알아야 돼! 역사 일부분이 아니라 양면을 다 알아야 돼, 그렇게 생각해서 평화 교육 내용을 만들었어요."
스미에 씨는 아이들과 평화 교육을 하면서 원폭 투하로 피해를 당한 한국인 피폭자들도 2만 명이나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학생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히로시마 평화공원에도 갔다.
"한국인 피폭자 위령비가 지금은 평화공원 안에 있는데 그 당시엔 밖에 있었어요. 이유가 표면적으로는 공원 안에 공간이 없다 그런 핑계였는데 실질적으로는 한국인 위령비를 공원 안에 두기가 싫어서... 밖에 있었어요. 그런 것을 학생들과 같이 그곳에 가서 그 위령비들을 건설하신 목사님들을 만나 직접 이야기도 듣고 학생들과 같이 공부했어요."
그 후에 스미에 씨는 교직원노동조합에서 한국인 피폭자들과 연대하는 사람이 많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 교직원노동조합 안에서도 그런 문제를 열심히 하는 선생님들이 있었어요. 그런 선생들이 한국 피해자들과 교류하는 투어가 있다 그래서 한국에 같이 왔어요."
김학순 할머니의 절규
1990년, 스미에 씨가 서울에 왔을 때 어떤 한국 여성이 일본군 '위안부'였던 할머니를 보호하고 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다. 스미에 씨는 그 사건이 먼 옛날 역사인 줄만 알았는데 현재 그 피해자들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전율이 일었다.
"실제 피해자가 존재하는 모습이 연결되지 않았어요. 옛날에 이런 거 있었구나, 과거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서울에서 그런 소식을 듣고 옛날 얘기가 아니라 지금 문제라고 깨달았어요. 지금은 공개할 수가 없는데 마음의 상처가 너무 커서 우리가 증오하고 있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한국 기독교 여성협의회라던가 하는 단체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