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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번호 반쪽짜리 개선안... 전면적 임의번호 부여해야"

민변 등 39개 시민사회단체, 새로운 주민등록번호 부여체계 재검토 요구

등록 2019.12.20 11:09수정 2019.12.20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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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10월부터 시행되는 '주민등록번호 변경사항'. ⓒ 행정안전부

 
행정안전부(이하 행안부)가 지역 표시 번호를 없앤 새로운 주민등록번호 부여체계 도입 계획을 발표했지만, 전문가와 관련 시민사회단체들은 주민번호 전면 개편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하 민변) 등 시민사회단체는 "주민번호 활용을 최소화하고 전면적으로 임의번호를 부여하는 온전한 개선안을 마련하라"며 재검토를 요구하고 있다.

17일 행안부는 주민번호를 통한 출신지역 정보 유출과 이에 따른 차별을 막고자 현행 주민번호 13자리 가운데 8~11번째에 표시되는 지역 정보를 삭제하고, 8~13자리까지 임의번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주민번호체계를 바꾸는 계획을 발표했다. 현행 주민번호는 지난 1975년부터 생년월일-성별-지역번호-등록순서-검증번호 등을 포함한 13자리로 구성돼 있다. 
     
해당 개편안에 따라 행안부는 현재 구축 중인 차세대 주민등록정보시스템에 번호 자동 부여 기능을 반영해 2020년 10월부터 새로운 주민등록번호 체계를 적용할 예정이다. 출생과 주민번호 변경·정정, 국적 취득의 경우에만 새로운 체계의 주민번호를 받게 된다. 기존에 주민번호를 받은 사람은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나 주민번호는 출신지 외에도 생년월일·성별 등 숫자 자체가 개인의 '고유 정보'를 담고 있는 점, 공공기관은 물론 민간까지 포함하는 모든 영역에서 사용되는 '범용성' 등의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민변과 진보네트워크센터를 비롯한 총 39개 시민사회단체는 19일 공동성명을 내고 "주민번호 자체에 성별·생년 등 고유한 개인정보가 포함돼 있기 때문에 유출로 입는 피해뿐만 아니라 차별에 노출될 가능성도 굉장히 높다"라며 "현재 대부분의 국가는 우리처럼 개인식별번호에 민감한 개인정보를 포함하지 않고 조세·사회보장 등 극히 제한된 공공 행정업무에만 한정해 사용하고 있으며, 그 외 민간영역에서는 개인 신분인증의 수단으로 활용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공동성명서는 이어 "행안부의 이번 개선안은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이라는 헌법상 기본권 보장 측면에서도 부합하지 않으며 관리의 효율성만을 앞세운 반쪽짜리 개선안이 아닐 수 없다"면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일부분 변경으로 갈음한다면 향후 또다시 제도 변경에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이 발생하게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공동성명서는 "행안부는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함과 동시에 주민번호로 인한 사회적 차별, 유출 위험 등을 줄일 수 있도록 주민번호 13자리를 전부 임의번호로 부여하는 방식의 온전한 개편안을 마련해야 한다"면서 "또한 주민번호 수집 법정주의를 엄격하게 관철해 주민번호를 최소한으로 사용하도록 제한하고, 목적별 식별번호 사용도 반드시 함께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행안부 개편안... 전문가들 문제 제기했던 것에 못 미치는 수준"


박정희 유신 독재 시절인 지난 1968년부터 현재까지 52년간 운영·유지된 현행 주민등록 제도는 전 국민에게 강제적이고 일률적으로 번호를 부여함으로써 국민을 감시와 관리·통제 대상으로 다룬다는 비판이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주민등록 및 지문 날인 제도는 일제가 1931년부터 만주국에서 시행한 국민수장(國民手帳)제도와 식민지 조선에서 1942년 제정한 '조선기류령'을 본뜬 것으로 알려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40년대 만주국 군관으로 복무하면서 일제가 국민수장 제도를 이용해 공산주의 사상범과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체포·관리하는 것을 목격했다. 전문가들은 5·16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뒤 박 대통령이 사실상 동일한 제도를 국내에 이식한 것으로 보고 있다.  

행안부가 작성한 '주민등록번호 수집 금지 제도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해외 국가 대부분은 과세·사회보장·노동·의료 등 제한적 목적에만 식별 번호를 쓰도록 하는 '목적별 식별번호'를 부여해 개인을 식별한다. 

미국(사회보장번호), 영국(국민건강보험서비스 등록 시 번호 부여), 캐나다(사회보험번호) 등은 소수의 행정업무에만 제한적으로 해당 번호를 사용하며, 정부와 정부가 지명한 기관만 사용하도록 사용 범위를 특정하고 있다. 캐나다는 사회보험번호를 제시해야 하는 경우 개인에게 목적, 강제성 여부, 제시 거부 시의 결과 등을 사전 고지토록 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주민통제를 실시한다고 알려진 북한의 경우에도 '공민등록' 제도가 있지만 총 6자리의 숫자가 거주지·출생연도 등의 개인정보를 담고 있지 않으며, 북한 주민들은 한국처럼 불심검문에 대비해 본인의 공민 번호를 외우지 않는다고 알려졌다. 또 공민증의 경우 기존 수첩 모양에서 플라스틱 카드로 바뀌면서 담고 있는 개인정보의 양도 대폭 줄었다고 한다.

한국은 주민번호 수집을 최소화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지난 2014년부터 법으로 정해진 경우에만 주민번호를 수집할 수 있도록 하는 주민번호 법정주의를 도입했으나 개인정보 유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광범위한 기관에서 주민번호를 활용하고 있다. 

이에 유엔(UN) 인권이사회와 국가인권위원회는 현행 주민번호에 포함돼 있는 생년월일·성별번호 등을 없애고 무작위 난수체계로 된 임의번호로의 변경, 법령 정비를 통한 주민번호 수집 허용 최소화, 민간영역에선 불가피한 경우에만 한정 허용 등의 내용을 권고한 바 있다.    

서채완 변호사(민변 디지털정보위원회)는 19일 통화에서 "주민번호 도입과정을 보면 깊은 고민이 없고, 해외 국가엔 없는 생년월일·성별 같은 식별인자가 있다. 시대에 뒤처진 제도이기도 하고, 차별을 양산하며, 범죄·사찰 등 악용 소지도 크다"면서 "정보인권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개인정보가 유출되면 다른 국가는 그것만 유출되지만, 우리는 주민번호가 연계돼 있으니까 한꺼번에 다 유출되는 위험성이 있다"고 전했다.

서 변호사는 행안부가 발표한 개편안에 대해서도 "활동가들과 전문가들이 지속적으로 제기했던 것에 비하면 못 미치는 수준"이라며 "전면적 개편에 대해 예산을 명목으로 난색을 표하지만 나중에 개선하면 더 많은 행정력과 더 많은 예산 투입이 필요하다. 목적별 식별번호는 다른 나라에서도 사용하는 방식이므로, 그런 것들을 고려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주민등록 #난수체계 #행정안전부 #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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