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용균씨가 '비정규직 그만 쓰개! 1100만 비정규직 공동투쟁'이 추진하는 '문재인 대통령과 비정규직 100인의 대화'에 참가 신청을 하려고 찍은 인증 사진이다. 김 씨는 위 사진을 찍은 지 두 달 뒤, 2018년 12월 11일 새벽 일터인 충남 태안 화력발전소 9.10호기 석탄운송설비 컨베이어벨트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사진제공 발전비정규직연대회의
용균이가 마지막 일했던 곳으로
2018년 12월 13일 김미숙씨는 현장에 들어갔다. 김용균씨가 사용하던 운전원 대기실에서 컵라면 등의 유품이 나왔다. 김용균씨가 사용하던 고장난 손전등, 건전지, 슬리퍼 등이 있었다. 김용균씨와 함께 일한 동료는 '용균이가 헤드 랜턴조차 지급받지 못한 채 일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원청에서) '낙탄 치우라고 수시로 지시가 내려온다'며 '언제 지시가 내려올지 몰라 식사 시간이 없어서 매번 라면을 끓여 먹이고 그랬다'고 설명했다. 김미숙씨는 가슴이 미어졌다. 사고 현장으로 가는 길은 더욱 위험했다.
"기계 하나가 아파트 15층 높이의 큰 건물이래요. 발전소 기계 하나가 그렇게 커요. 일반 계단은 비스듬하게 올라가게 되어 있잖아요. 근데, 여기는 거의 직각 계단이에요. 정말 무슨 훈련받는 느낌이었어요."
김미숙씨가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탄가루와 먼지가 눈처럼 쌓여 있었다. 들어가면서 내리막이 있는데 미끄러질 것 같았다. 옆에 잡을 것이 있어서 잡으려고 했더니 용균이 동료들이 잡지 못하게 했다.
"여기는 원래 가동하고 있을 때는 옆에 아무 것도 잡으면 절대 안 된다고 그러더라고요. 왜냐면 회전체가 다 거기 있으니까 위험하다고. 만약에 그냥 미끄러지면 잡을 데 없이 미끄러질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또 가다 보니 바닥에 호스 같은 게 있어요. 잘못하면 넘어질 수도 있는 그런 것들이 있었고 무덤처럼 쌓여 있는 낙탄들이 있었어요. 용균이는 그 9, 10호기에서 일을 했대요. 철판으로 쌓여 있어요. 컨베이어 벨트가 중간에 지나가고.
근데 이게 그 안에 들어가려면 성인 남자가 반 구부려서 이렇게 들어가서 삽질하고 확인할 수 있게끔 그렇게 구조가 되어 있어요. 밤이 되면 여기는 안에 불이 없으니까 컴컴하죠. 그러니까 헤드랜턴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 철판 바깥에 풀코드라는 긴 줄이 있어요. 이건 위험할 때 당기는 줄이에요. 그게 평소에는 쭉 늘어져 있대요. 왜냐면 조금만 건드려서 스톱되면…. 다시 가동하려면 삼십 분 이상 걸린대요."
위험할 때 당기는 줄을 일부러 느슨하게 해 놨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이 풀코드를 당기려면 원청의 허락이 있어야 된대요. 만약에 잘못 당겼다 그러면 기계가 스톱되고 하청은 돈을 못 벌잖아요. 삼십 분 동안 못 번 거를 손해배상 해 줘야 된대요. 하청이 원청한테. 그리고 밤에 사고가 나서 원청한테 보고를 하잖아요. 그러면 이게 몇 단계 올라가서, 전화를 몇 군데 올려서 허락 맡고, 몇 군데 또 내려와서 여기한테 연락 주게 되어 있어요. 밤에 누가 빨리빨리 전화를 받고, 연락이 잘 안 되잖아요. 정말 저는…"
김미숙씨는 인터뷰 내내 '정말', '말도 안 되는', '엄청'이라는 말을 많이 했다. 도저히 표현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계속 일어났기 때문이다.
"(특조위에서) 용균이가 업무 수칙을 다 지켜서 죽었다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원청은 하청을 주었으니 책임이 없다 하고, 하청은 또 내 사업장이 아니니까 책임 소재가 없다 그러고…"
김미숙씨는 마지막으로 맨 위층에 올라갔다. 사고가 난 장소였다.
"기가 막혔어요. 청소가 돼 있어서 사고가 났는지 뭐 했는지 표시가 하나도 없어요. 애가 왜 죽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갔는데 아무런 흔적이 없어요. 회사에서 덮으려 하고 있구나, 그 생각이 딱 드니까 정말… 분해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용균이가 죽고 나서 시신 수습도 안 됐는데 그 옆에서 기계를 가동했다는 말을 들었어요. 용균이가 쓰레기인가… 최소한 짐승이 죽어도 아파하고 그러는데 내 자식은 뭔가…"
김용균씨는 이제 스물다섯 살이었다. 군대 갔다 와서 일 년 동안 스펙을 쌓다가 7개월 동안 여기저기 이력서를 넣은 끝에 겨우 얻은 직장이었다.
"첫 직장이었어요. 저는 우리 용균이보고 '너는 엄마아빠한테는 정말 생명 같은 존재니까, 몸 잘 보살펴야 되고, 차 조심 늘 해야 되고, 나갈 때마다 조심해라.' 맨날 그러고 살았죠."
김미숙씨는 사고 원인이 밝혀지고 책임자가 처벌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대책위를 통해 산업안전보건법이 있다는 걸 처음 들었다. 이름뿐인 법이었다. 그 법에는 중대 사고에 걸맞게 처벌하는 조항이 없었다. 세상을 다시 보게 됐다. 여태 자기가 살았던 세상이 이런 세상이었다는 걸 이제야 깨닫게 됐다. 생각만 해도 억울해 정신을 추슬렀다. 시민대책위와 함께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을 요구하면서 국회를 드나들었다.
"3일 동안 국회를 갔어요. 사고를 낸 원청을 처벌하는 법이 통과돼야 원청을 처벌할 수 있다고 들었어요. 당연히 개정해야 되는 거잖아요. 이 법이 왜 가로막히고 통과가 안 되는 건지 이해가 안 갔어요. 소리도 지르고, 때로는 읍소도 했어요."
그렇게 김미숙씨가 싸울 무렵 위험한 업무를 하청 업체에 떠넘기는 '위험의 외주화'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었다. 죽음까지 외주로 돌린다는 '죽음의 외주화'라는 표현도 나왔다. 김용균씨를 추모하는 추모제가 곳곳에서 열리는 등 비판 여론이 높아지자 정치권도 이를 외면하기 어려웠다. 결국 2018년 말 위험의 외주화를 방지하고 산업 현장의 안전 규제를 강화하는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 개정안, 이른바 '김용균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름뿐인 '김용균법'
'김용균법'이 통과됐지만, 유가족과 시민대책위는 김용균씨의 장례를 치르지 못했다. 비슷한 사고를 막기 위한 대책이 보이지 않았고 책임자를 처벌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민대책위의 공동대표단들이 광화문광장에서 단식 농성에 돌입했다. 이들은 정부가 고 김용균씨 죽음의 진상을 밝히고,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 대책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여론이 점점 악화될 무렵인 2019년 2월 5일 정부는 진상 조사와 재발 방지책을 약속했다. 발전소 사측에도 약속을 받고 유가족과 시민대책위는 2월 9일 민주사회장으로 김용균씨의 장례를 치렀다. 유해는 마석 모란공원에 안치됐다.
"합의안 끌어낸 다음에는 당연히 장례 치른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장례를 치르는데 아주 크게 했잖아요. 저는 그런 행사를 난생처음 보고 겪었어요. 그런데 실감이 안 났어요. 무슨 꿈을 꾸는 건지, 이게 진짜 현실인지, 용균이가 금방이라도 올 거 같은데… 애가 갔다고 그러는데 아직도 어딘가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전화를 해도 안 받고 톡을 해도 안 받아요. 전화기를 들면 그 안에 용균이 영정 사진도 있고 무덤 사진도 있어요. 애가 뼛가루가 되어서 묘에 들어간 거까지 내 눈으로 다 봤는데, 우리 아들이 여기 묻힌 게 맞나? 이런 게 '죽은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