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암살 2개월 전인 1949년 4월 20일 이승만 대통령에게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사진을 증정하는 존 무초(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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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격변기에 외교대표를 교체할 때는 다 이유가 있다'는 점은 주한미국대사 파견의 역사에서도 드러난다. 초대 주한미국대사인 존 무초(John Joseph Muccio, 1900~1991)의 사례를 우선적으로 들 수있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3세 때 미국으로 이주하고 1921년 브라운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국적을 취득한 무초는 1923년부터 외교관 생활을 했다. 독일, 영국령 홍콩, 중국, 파나마, 쿠바에서 서기관이나 영사로 근무한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막판인 1945년 4월 유럽점령군사령부의 독일 정치고문관이 됐다.
1946년부터 국무부에서 동북아 사무를 관장한 무초는 48세 때인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 직후에 주한미국특별대표로 임명됐다. 대한민국에 대한 미국의 정부 승인이 이뤄지지 않은 시기라서 대사가 아니라 특별대표로 임명됐다. 하지만 실제로는 대사나 마찬가지였다. 이듬해 4월, 그는 정식 대사가 됐다.
무초가 특별대표로 파견된 시점에서 한미관계의 최대 현안은, 미군정청 사무를 대한민국정부에 이관하는 것이었다. 3년간의 미군정 활동이 대한민국정부로 잘 계승될 수 있도록 하는 게 특별대표의 최대 과제였다.
이런 시기에 무초가 발탁된 배경이 '트루먼 도서관' 홈페이지(trumanlibrary.gov)에 실린 무초와 제리 헤스(Jerry Hess)의 인터뷰에 담겨 있다. 역사가인 제리 헤스에 의해 1971년 2월 10일 작성된 '존 무초, 구술 역사 인터뷰, 1971년 2월 10일(John J. Muccio Oral History Interview, February 10, 1971)'에 따르면, "당신이 이 특별한 위치에 발탁된 이유에 관해 어떤 의견을 갖고 계십니까?"라는 질문에 무초는 이렇게 답변했다.
"글쎄요, 나는 꽤 오랫동안 부서(국무부 지칭)에 근무했거든요. 그때까지도 독신이었고, 꽤 건강했어요. 의심할 여지 없이 상하이와 중국 여타 지역, 독일, 파나마에서 얻은 경험이 핵심 요인이었죠. (중략) 합중국 군대와 오랫동안 함께한 경험이 내가 발탁되는 데 영향을 줬죠."
국무부 경험, 독신, 건강, 중국·독일·파나마 경험에 더해 미군 활동 경력이 임명 배경이 됐다고 무초는 말했다. 제2차 대전 막판에 유럽점령군사령부 정치고문관으로 일한 경력이 고려됐다는 것이다. 이 경력이 미군정을 대한민국정부로 연착륙시키는 데 도움이 되리란 판단하에 미국 정부가 자신을 파견했을 거라고 해석한 것이다.
미국의 아시아 동맹국인 한국·필리핀에서 민주화 열기와 반미운동이 고조되던 1986년, 미국 정부는 제임스 릴리 전 중앙정보국(CIA) 중국지부장을 주한미국대사로 임명했다.
아버지가 미국 석유회사의 중국지사 간부였던 이유로 1928년 중국 산둥성 칭다오에서 출생한 제임스 릴리는 1940년 미국으로 이주해 예일대학을 졸업한 뒤 CIA 동아시아 요원이 됐다. 1979년 CIA를 은퇴한 뒤에는 로널드 레이건 정부의 안보보좌팀에 근무하다가 타이완미국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1986년 시점에 미국이 그를 한국에 파견한 이유는 그의 회고록인 <중국통(Chinese Hands)>에 소개된 상원 인준청문회 장면에 묻어 있다. 상원 외교위원회의 주한대사 후보자 인준청문회에서, 훗날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되고 버락 오바마 행정부 국무장관이 될 존 케리 민주당 의원이 "지금 한국에서 무엇이 우선이라 보십니까? 안보입니까, 민주주의입니까?"라고 질문했다. 주한대사에게 필요한 상황 인식을 갖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이 질문에 대해 릴리는 이렇게 답변했다.
"저는 한국에 민주주의가 정착되기를 무엇보다 바랍니다. 하지만, 우선 우리는 북쪽 방어지대를 튼튼히 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가 한국을 지원한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시켜야 합니다."
민주주의보다는 안보가 중요하고, 지금은 전두환 정권에 대한 지원 의사를 표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떤 식으로 미국의 지원 의사를 표시할 것이냐?'고 묻자, 릴리는 전두환 정권에 대한 레이건 행정부의 지원을 거론했다.
전두환이 쿠데타를 했는데도 레이건이 백악관에 초청한 사례를 언급하면서 그것을 참고해야 한다고 답했다. 전두환에 대한 강력한 지지를 통해 민주화운동과 반미운동에 제동을 걸고, 필리핀 피플파워가 한국에 확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인식을 갖고 있던 제임스 릴리를 한국에 보냈다는 것은 당시의 미국이 한국 민중의 정치적 기운을 억제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1987년 6월항쟁으로 그 의도는 실패했다.
폼페이오의 의중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