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첫 범우문고부터 현재까지 디자인과 판형이 조금씩 바뀌었다.(왼쪽부터) 가장 공들인 책꼴은 역시나 첫 장정, 가장 인기 있던 시절은 두 번째다.
조경국
<무서록>을 구입해 읽은 것은 20대 후반이었다. 109번째 범우문고로 나온 <무서록>을 제대하고 읽고선 감명했던 것은 <문장강화>에서 배운 바가 컸기 때문이었다. 대학 시절 선배의 강요로 읽은 <문장강화>는 글쓰기의 맥을 알려주는 길눈이였다(<문장강화>도 범우문고로 나왔으나, 1988년 창비 교양문고로 나온 것이 더 앞섰다).
<문장강화>에서 이태준은 수필에 대해 "누구에게 있어서나 수필은 자기의 심적 나체다. 그러니까 수필을 쓰려면 먼저 '자기 풍부'가 있어야 하고 '자기의 미'가 있어야 할 것이다"고 했다. <무서록>은 <문장강화>에서 말한 '자기 풍부'와 '자기의 미'의 증거다.
다른 문학작품보다 수필이 특별한 건 작가의 '심적 나체'를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글들보다 수필은 작가의 깊은 속까지 숨김 없이 드러낼수록 더 매력적이다. 그만큼 작가는 고통스럽겠지만.
어쨌거나 주머니 가벼웠던 젊은 시절 <무서록>을 목록에 포함하고 있던 '범우문고'는 훌륭한 책동무였다. 지금이야 값이 권당 4,900원이지만 이 책을 구입할 20년 전만 하더라도 2천 원이었다. 서점에 가서 부담없이 한 권 고를 수 있는 값이었다. 물가를 감안하면 지금 가격도 비싸다곤 할 수 없다.
헌책방에서 범우문고 초판본을 보면 값을 따지지 않고 구입한다. 간혹 보이던 것이 요즘엔 거의 찾아보기 힘들고 특히 이제 더는 나오지 않는 법정스님의 <무소유> 초판본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고 가격도 상당히 비쌀 것이다(검색해 보니 15만 원이 가장 저렴한 가격이다). 예전에는 흔했으나, 흔했기 때문에 대접받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 것들 중에 옛 문고 시리즈들이 있다.
범우문고 초판본도 귀하지만 40년이 넘은 출판사 문고 시리즈 홍보 팸플릿은 발견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해야겠다. 아마 <무소유>보다 더 찾기 힘들지 않을까. 헌책방 책방지기 입장에선 이런 물건이 귀하고 가치 있는 물건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별 의미 없는 종잇조각일 테다. 어쩌면 이런 사소한 물건들이 훗날 지나간 시간의 틈을 메울 수 있는 사료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쉽게 버리지 못하고 쟁여두는지도 모르겠다.
<무소유>, <인연>... 독서의 대중화 이끈 범우문고
책 속에 팸플릿을 끼워 홍보하는 건 옛 방식이다. 예전에는 범우문고처럼 시리즈나 제작비를 많이 들인 전집, 출판사가 미는 작가의 책이 나왔을 때 여러 책을 함께 소개하는 팸플릿을 만들어 나눠주는 경우가 많았다.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앞선 글에 소개했던 책갈피형이고, 두 번째가 팸플릿이다. 출간 목록과 짧은 소개글을 넣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다른 방식은 다음에 소개할 계획). 이 팸플릿만 놓고 보면 출판사가 어떤 책을 출간했는지, 어떤 작가와 책에 집중하고 있는지 단번에 알 수 있다. 출판사 팸플릿은 당시 그 출판사의 현황을 보여주는 작은 지표라 생각한다.
1976년부터 나오기 시작한 범우문고는 처음엔 '범우에세이문고'와 '범우소설문고'로 나뉘어 있었으나 나중에 목록을 합쳤다. 문고 시리즈를 시작하고 한 해만에 에세이문고는 65권(권당 280원), 소설문고는 35권(권당 350원)이나 출간했다(책만 귀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책값을 다른 물건과 비교하는 건 내키지 않지만, 당시 인기 있던 담배 '거북선' 한 갑이 200원이었다. 그래도 담배보다는 책이 더 귀한 물건이지 싶다). 범우문고가 40년이 넘은 현재 목록이 312권인 걸 감안하면 얼마나 폭풍같은 속도와 기세로 책을 쏟아냈는지 알 수 있다. 요즘 같은 시절엔 엄두도 못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