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3년 5월 23일 열린 유림들의 호주제 폐지 반대 집회.
남소연
"성씨를 갖는다는 것은 단순히 형식적 차원이 아니라 가족 내에서 구성원의 위상을 결정하는 것", "(부성만을 고집하는 것은 여성을) 남성의 가계에 편입하고 부계 혈통을 이어가는, 부차적이고 도구적인 위치에 머물게 하는 것" -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
여전히 여성은 다양한 차별에 직면하며 살아가고 있어. 여성이 아버지, 남편, 남자친구에 의해 살해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여성은 집 안팎에서 돌봄노동을 전담하고 있으며, 여성의 신체와 태도는 평가받고 규정 당해. 그리고 여성은 여전히 남성보다 더 적은 임금을 받아. 통계청의 '2018년 임금근로 일자리 소득 결과'에 따르면 남성 평균 소득은 347만 원, 여성은 225만 원으로 남성이 여성의 1.5배 수준이야. 한국의 성별 임금 격차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가장 심하지.
우리 제나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숱한 편견의 굴레와 싸워야 할 거야. 운동장은 여전히 한참 기울어져 있고,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그럴 테니까.
그런 너를 위해 아빠와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어. 서로에게 평등한 관계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같이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는 다양한 움직임에 힘을 보태는 거지.
엄마 성을 물려주자는 결정은 그래서 자연스러운 결정이었어. 마치 길에 휴지를 버리지 않듯이, 한 달에 몇 만 원이라도 시민단체에 후원금을 보내듯이, 빠지지 않고 투표장에 나가듯이, 엄마와 아빠가 할 수 있는 작고 일상적인 실천의 하나야.
우리의 선택을 통해 여성도 자녀에게 성을 물려줄 권리를 갖고 있으며, 그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는 데 기여하고 싶어. 그래야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별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렇다고 이것이 남성들의 권리를 빼앗는 건 아니야. 남성과 같은 권리를 여성도 갖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될 때 우리 사회가 모두에게 '제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유'를 줄 수 있겠지.
사실 우리는 성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우리 가족만 보아도 할머니는 정씨, 외할머니는 강씨, 엄마는 이씨, 아빠는 박씨, 너의 사촌언니들은 홍씨잖아. 할 수 있다면 아예 성을 안 쓰는 선택을 했을 거야.
"사람들이 오해해"
우리의 선택이 의미 있다고 지지해주는 사람들 중에도 이런 걱정을 하는 이들이 많았어. 아빠와 아이가 성이 다르면 사람들이 오해한다는 거야. 무슨 오해일까? "쟤는 아빠가 없나 보다", "쟤네 아빠는 친아빠가 아닌가 보다" 이런 오해겠지.
이런 생각은 한부모 가정이나 이혼-재혼 가정에 대한 편견에 기인하고 있어. 더불어, 결혼과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족만 진짜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편협함이 깔려 있지. 아빠가 없으면 무슨 문제가 있나? 아빠가 친아빠가 아니면 뭐 어때서? 결혼하지 않고 살면 어때? 동성 부부이면 어때? 누가 나의 가족인지는 내가 정하면 되는 거지.
앞으로 가족의 형태는 더 다양해질 테고 그걸 수용해야만, 저출산과 1인 가족 증가 등의 변화를 겪고 있는 우리 사회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해.
"어떻게 아빠와 자식이 성이 다를 수가 있어?"
간혹 우리의 선택에 하늘이 무너진 듯 놀라는 분들도 있어. 부성주의라는 기존의 규칙이 절대불변의 명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당연히 아빠 성을 따라야지"라고 말하는 사람들.
하지만 대체 그게 왜 당연한가? 어떤 과학적 이유라도 있나? 설마 대가 끊긴다든지 혹은 혈통관계의 구분을 위해서라든지와 같은 비합리적 이유는 아니겠지. 이런 분들에게는 엄마 성을 따라도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수밖에.
누군가에게는 허락되지만, 누군가에게는 제한되는 일을 두고 당연하다고 말해서는 안돼. 세상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들을 항상 의심하렴. 누구의 입장에서 당연한 것인지.
당연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구속하는 낡은 그물들이 많아.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받아들일 때 더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얻고, 세상은 더 좋은 곳이 되더구나.
우리는 너에게 성이 아니라 함께 자유롭게 살아가자는 가치를 전해주고 싶어. 사실 엄마 아빠의 주변인 중 거의 대부분은 엄마 성 쓰기에 대해 '대단하다', '멋있다'라고 말해줬어. 자녀가 여러 명일 때 절반씩 엄마 성과 아빠 성을 따르도록 하면 좋겠다는 이들도 있었어. 매우 합리적인 생각 아니니? 그런 반응이 큰 힘이 되었단다. 너도 자신있게 네 이름에 대해 말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