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화 남해여성회 회장이 경상대 대학원 학위논문(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고 박숙이 할머니 생애사 연구)을 남해추모누리 공동묘지에 있는 박 할머니의 묘소 앞에 놓아두었다.
남해여성회
"손녀손자들이 장성하여 남해를 떠날 때까지는"
할머니는 80대 후반에 '위안부 피해자 신고'를 결심했다. 김 회장은 "할머니는 손녀와 손자 3명이 장성하여 남해를 떠날 때까지는 말하지 않고 있다가 85살이 되어서 신고를 결심했다"고 들려주었다.
그런데 할머니는 어디에 어떻게 신고를 해야 하는지도 몰랐던 것이다. 결심을 하고 나서 3년 넘게 관공서를 왔다갔다 했지만 차마 자신의 입으로 "내가 위안부 갔다 왔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박숙이 할머니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한 '제보자' 때문이다. 몇 번을 관공서에 찾아갔지만 '공개'하지 않다가 하루는 찾아가 "내가 누군 줄 알고 함부로 대하느냐. 내가 왜정 때 일본 사람들 밥, 빨래해주고 일한 사람인데…"라고 했다. 그때까지도 '위안부' 말을 못했다고 한다.
당시 이런 할머니를 예사롭게 보지 않았던 '제보자가' 남해로 출장을 갔다가 할머니가 관공서에서 언성을 높이는 장면을 보고는 무슨 사연이 있겠다 싶어 인터넷 검색을 해서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 함께하는 마창진시민모임 이경희 대표를 찾아 연락했던 것이다. 이후 이경희 대표가 할머니댁을 찾아 피해자 등록을 주도했다.
김정화 회장은 "박숙이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피해자가 맞다는 생각에 밤 12시경 여성가족부 담당관에게 전화를 했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박 할머니는 236번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이 되었다.
할머니가 말년에 학생들 앞에 서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내 소원? 내 소원은 딴 거 없다. 내 한테 아무 일도 없었던 16살 그 때로 내를 돌리놔라(한숨). 일본놈들이 내 청춘을 다 뺏어 갔다 아이가. 억울하고 분해, 잠도 안와. 나이를 이 만치 묵어서 뭔 소원이 있것노? 할 수만 있다카모 학생들한테 강연하는 거. 그기 젤로 하고 싶다. 이제는 훌훌 다 털어내고 싶다."
김정화 회장은 "그토록 오랜 세월을 말하지 못했던 일을 강연으로 풀어내려 하신다는 것에서 할머니의 강인한 의지가 느껴졌다"고 했다. 할머니는 대학생들 앞에서 다음과 같은 말도 했다.
"우리가 일본한테 진 것은 무기가 없어서라. 우리 조선은 칼인데 일본놈들은 총을 들고 싸운 게 우찌 이기것노. 열심히 공부해서 부디 잘 사는 부국 만들어달라. 무기도 많이 장만해서 전쟁 하면 이겨야 된다 (…) 텔레비전 보면 지가 놓은 애를 못 키워서 갖다 버리는 사람도 있는데, 천벌 받을 짓이다 (…) 요즘 아이를 안 놓고 개만 키워. 전쟁나면 개가 나가서 싸울 거가."
2015년 12월 28일에 있었던 '한일 위안부 회담'에 대해, 박 할머니는 "내한테 위안부 협상이 있었다고 말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어떤 건지 말해주는 사람도 니(김정화)가 처음이다. 고통을 당한 거는 낸데, 미안타고 사과한다고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와서 말하는 사람이 없다 아이가"라고 했다고 한다.
김정화 회장은 "기록과 기억 행동, 사회적 재현으로 일본군 '위안부' 운동을 이어갈 때, 일본군 성노예제도와 같은 반인도적 전쟁 성범죄가 인류에게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회장을 비롯한 남해여성회는 2017년부터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의 날'에 남해지역 인권문화제인 "숙이나래 문화제"를 열어오고 있으며, '경남지역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건립추진위원회' 활동도 하고 있다.
남해에는 2015년 박숙이 할머니의 모습을 재현한 '평화의 소녀상'이 건립되었고 이곳을 '숙이공원'으로 부르고 있다. 박 할머니는 남해추모누리공동묘지에 잠들어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19명만 생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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