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반신 털을 민 고양이 달이
박은지
결국 피하고 싶었던 마지막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하반신 털을 다 밀어버린 것이다. 머리부터 배까지는 노란 털이 복실거리는데 엉덩이는 헐벗은 몸이 됐다. 집에서 셀프로 미용했더니 심지어 처음엔 몹시 울퉁불퉁했다. 달이는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괜히 나만 속이 상했다. 그래도 털을 민 보람이 있어서 링웜은 더 나빠지지 않았고, 얼마 뒤에 겨우 완치 판정을 받았다. 한동안 달이를 본 이웃들에게 '달이 바지 벗었네?' 소리를 들어야 했지만 말이다.
멀쩡하던 고양이가 어느 날 아프기 시작하면 집사는 그 책임을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동물병원에서 내 잘못이 아니라고,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설명해줘도 어디가 잘못되었던 걸까, 하고 몇 번이고 기억할 수 없는 나의 잘못을 더듬어본다. 초보 집사 시절에는 특히나 나 때문에 내 작은 고양이가 고생하는 것 같아 펑펑 울었던 날들도 많았다. 그래도 이제는 지난 일보다 앞으로 우리가 함께 극복해나가야 할 일이 더 중요하다는 걸 알기에, 조금은 의연해진 것 같다.
달이의 건강을 하나씩 회복해나가며 느낀 건 '보호소 고양이라 이렇게 아프구나'가 아니라 오히려 달이가 지니고 있던 불안 요소가 이제야 하나씩 표면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힘이 들어가 있던 몸에 긴장이 풀리며 안간힘을 써 버텨내던 몸이 비로소 약해지는 경험이 있지 않던가.
달이도 내 곁에서 지금까지 어디가 아팠는지 알려주면서 비로소 더 건강한 고양이가 되어가는 중이리라. 우리는 서로 완벽하지 않은 존재다. 약한 모습을 보여주며 서로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다면, 그렇게 조금씩 서로의 우주를 채워가는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 셈이 아닐까.
다행히 달이의 줄줄이 이어진 잔병 시리즈는 일종의 신고식이었던 것처럼, 입양 1년 이내에 링웜을 마지막으로 어느 정도 끝이 났다. 그 후로 지금까지는 별일 없이, 조금씩 면역 체계를 채우며 건강해지고 있다. 아, 물론 바지 벗은 하반신도 이제는 털이 다 자라 다시 온몸으로 북실북실한 털을 뿜는 예쁜 노란 고양이로 돌아왔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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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명 높은 병... 결국 '바지 벗은'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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