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한동안 차인 B를 위로해주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위장에 술을 쏟아부어야 했다.
JTBC
다음엔 B가 옆 동아리 남자아이에게 홀딱 빠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남자애 역시 까무잡잡한 피부에 무뚝뚝한 표정이 꼭 A가 좋아했던 그 남자애 같기만 했다. B 역시 A와 비슷한 이유로 그 남자애에게 빠진 듯했다. 똑똑하며 또 가끔은 친절하게 군다나. 왜 내 친구들은 가끔만 다정하거나 친절한 남자에게 빠지는 걸까?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마음이 설레는 건 찰나다. 도리어 상대를 하염없이 떠올리느라 바보 같아지거나 아니면 그와 나와의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슬퍼해야 한다. 나는 이미 A를 통해 알고 있었고, B를 통해 재확인할 수 있었다. 좋아하는 애가 있는데 그 애는 나를 동아리 '친구 15'쯤으로 생각할 때의 심정이란.
B는 결국 고백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B를 어찌나 뜯어말리고 싶던지. 그 애가 친구를 좋아하는 눈치라곤 없는데 무턱대고 고백을 해버린다니. 하지만 B는 내 생각과 다른 듯했다. 우선 이쪽에서 마음을 표현해야 그 애도 자기의 마음을 따져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우리는 B가 고백하기 며칠 전부터 '언제, 어디서, 어떻게' 고백을 해야 좋을지 의논했다. 하지만 B는 저도 모르게 그냥 아무 때, 아무 데서나, 충동적인 방식으로 고백을 해버리고 말았다. 둘이 자주 마주치던 동아리 방 근처 복도에서. B는 차였다. 우리 A부터 E(나)까지는 한동안 B를 위로해주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위장에 술을 쏟아부어야 했다.
스무 살, 아무 이유 없이 사랑에 빠지다
우리는 그해 내내 똘똘 뭉쳐 다녔다. 어느 정도였냐면, 수업을 듣다가 A와 E(나)가 몸을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며 문을 가리키면 B와 C 그리고 D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두 준비가 끝난 걸 확인하면 나쁜 학생 다섯 명은 마치 당구공이 하나씩 구멍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듯 문을 차례대로 빠져나갔다. 가끔은 F, G 등 남자친구들도 우리를 따라 나오곤 했다.
우리가 향한 곳은 주로 피시방, 포켓볼장, 보드 게임방이었다. '가끔' 술집에 가기도 했는데, 앞에다 '가끔'을 붙인 이유는 낮부터 술을 마시는 걸 자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은 낮부터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때 E(나)가 누군가를 좋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며, 그래서 E가 자주 슬퍼졌기 때문이다.
A와 B는 지난 사랑에서 벌써 깔끔히 벗어난 상태였고, C는 우리 중 처음으로 보란 듯이 연애를 하고 있었다. D는 눈에 띄는 누군가를 찾지 못한 상태였다. (D는 2학년이 된 후 후배와 짧게 연애를 했다. 그러나 그 연애 끝에 D는 자신이 연애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내가 아는 사람 중 최초로 '비혼주의자'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얼마 전부터 아무 이유 없이 Y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래서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어느 날은 의문이 들었고(내가 걔를 왜 좋아하지? 걔는 내 스타일이 정말 아닌데), 어느 날은 그 애가 너무 보고 싶었고(보면 뭐해, 걔가 나한테 말을 거는 것도 아니고), 어느 날은 괜히 그 애를 괴롭히고 싶었다(초딩때도 안 하던 짓을 이제 와서?). Y는 말랐다는 점을 제외하곤 정말 내 스타일이 전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