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빚에 얼룩진 나의 스무 살

[창간 20주년 공모- 나의 스무살] 행복했던 쌍문동의 우리들

등록 2020.02.25 09:50수정 2020.02.29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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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을 듣고도 사람 좋게 방긋 웃어야 했다. 카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차림을 평가하던 그녀들에게 맞장구를 치던 중이었다. 이름 모를 브랜드들과 각종 패션용어로 대화 나누던 친구들 틈에서 내 눈에 들어온 건 독특한 패션의 행인이 신은 희한하게 생긴 신발이었다. 저 신발 이상하지 않으냐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들은 내 가방을 쳐다봤다.


몇 개씩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던 스무 살의 나는 10만 원짜리 가방도 쉽게 살 수 없었다. 백화점 명품관을 편의점 드나들듯 다니는 아이들과 그래도 마음을 나누는 친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신발과 가방으로, 내가 사는 집의 가격으로 평가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자존심 상했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지만 꾹 참았다. 눈이 휘둥그레져서 박수치며 그녀가 겨울 방학에 비즈니스석을 타고 동남아 별장으로 가족여행 다녀온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가족은 20년 넘게 서울의 쌍문동에 살았다. 그만그만한 집 친구들과 서로의 집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자랐다. 우리는 집안 이야기를 하며 많이 울었다. 빚 300만 원으로 옥탑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한 우리 엄마, 포천 공장에서 얼짱 커플로 유명했다던 친구네 엄마, 편찮은 할머니를 모시느라 파출부 일을 못 그만두신다던 또 다른 친구네 엄마. 우리 동네 엄마들의 젊은 시절은 슬펐지만 억세고 꿋꿋했다. 친구들과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걸으며 차비를 모아 떡볶이를 사 먹으며 우리 엄마들과는 다른 화려한 스무 살을 꿈꿨다.

대학교에 가니 전국 각지를 비롯해 해외 출신 학생까지 다양한 배경의 학생들이 있었다. 살랑거리는 원피스에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전공서적을 들고 캠퍼스를 누비겠다는 꿈이 현실이 된 기쁨도 잠시였다. 등록금 고지서를 본 부모님의 옅은 한숨소리에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시간표를 짜는 것과 동시에 아르바이트와 고등학생 과외 수업 일정을 잡아야 했다. 그러는 와중에 기사가 운전해주는 검은 차를 타고 통학하는 친구, 두 학기 등록금보다 비싼 가방을 몇 개씩 사던 친구들과 함께 점심을 먹어야 했다.

전셋집에 살던 우리 부모님도, 20억이 넘는 집에 살던 그 친구들의 부모님도 열심히 살았는데 왜 이렇게 다른 걸까. 잘 사는 집 친구들은 비가 조금만 와도 지하철로 한 시간도 넘는 거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택시를 타고 갔다. 반면 우리 엄마는 여전히 시장에서 과일과 야채를 한가득 사서 검은 봉지가 손가락 마디를 끊어놓을 것 같은데도 집까지 걸어간다고 고집을 피웠다. 기본요금 거리인데 왜 그렇게 고집을 피우냐며 엄마에게 길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스무 살의 내 몸은 성인이었지만 내면은 아직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이 같았다. 좀 더 성숙했다면 좋았을걸. 친구들을 향한 부러움과 열등감을 해소할 길이 없어 엄마에게 화풀이를 해댄 거다.

친구들은 부모님이 준 신용카드를 가지고 있었다. 고급 신용카드를 들고 각종 혜택을 받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공기업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나도 신용카드를 만들었다. 한도는 100만 원. 신용카드가 생기니 뷔페에 가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월말 생활비가 모자라 편의점과 학생식당에 갈 일이 없어졌다. 매일 지나치는 지하상가에서 내 시선을 잡던 10만 원짜리 원피스도 고민 없이 살 수 있었다. 친구들 틈에서 100만 원은 아주 가벼운 돈 같았다. 당시 내 수입에서 생활비를 빼고 남은 여윳돈의 두 배였는데도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추가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소액 은행 대출까지 받았다. 빚은 20만 원에서 시작해 200만 원까지 불어났다.


남의 돈 200만 원은 스무 살의 일상을 무너트린다. 시급 5000원인 아르바이트를 아무리 해도 핸드폰 요금, 식비, 차비 등을 지불할 현금을 남기지 않고 지난달 카드값이 빠져나간다. 크지 않은 액수의 빚을 갚느라고 아르바이트 시간을 늘리면서 성적도 떨어지고 장학금도 받지 못하게 됐다. 그 와중에도 돈 많은 친구들과 식사하며 열등감을 느낄 때면 밥값을 계산하며 기분 전환을 했다. 스무 살의 시간과 판단력을 빚에 저당 잡힌 거다.

감당 못 할 빚을 만들고 부모님과 싸우기를 반복했다. 엄마 아빠는 손이 떨려서 쓸 수 없는 50만 원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쓰느냐고 물었다. 그런 부모님에게 내가 언제 명품가방이라도 샀느냐고 되물어 따졌다. 어깨에 샤넬백을 메고 다니는 애들 보면서 나에게 미안하지도 않느냐는 말을 화살처럼 부모 가슴에 쏘아댔다. 밖에서는 자신감있고 당당한 내 모습에 심취해 여러 단체 활동을 했다. 그렇게 내 스무 살은 열등감과 거짓으로 칠해졌다. 부모님에게 독한 소리를 쏟아내면서 빚을 갚아나갔다. 20만 원, 30만 원 아빠에게 돈을 받아 카드빚을 갚은 적도 있다. 그러면서도 중고등학교 때부터 유학 다녀온 애들도 있는데 난 뭐냐는 말을 지껄였다.

죽어라고 뜀박질을 해도 절대 따라잡을 수 없이 저 앞으로 가는 친구들의 뒷모습만을 보는 게 싫었다. 명품 가방을 사진 못했지만 10만 원 대 옷과 가방을 사들이며 계획 없는 소비를 지속했다. 매 달 카드값은 수입보다 일이십만 원이 더 나와 결제일만 되면 중고나라에 물건을 내다 파는 등 돈을 만들어야 했다. 그러다 몇천 원이 부족해 카드대금이 연체됐고 후불 교통카드 사용이 중지됐다. 적금은 깬 지 오래고 수중엔 동전 하나 없었다. 지하철 역무원에게 돈이 한 푼도 없는데 학교에 가야 하니 한 번만 태워달라고 말하던 날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신용카드를 없애고 다시 가계부를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스무 살의 나는 내 힘으로 줄일 수 없는 차이를 받아들였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의 나는 엄마와 닮은 삶을 살고 있다. 내 집 한 칸을 가지려면 나도 엄마처럼 살아야만 하는 거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여전히 차이를 받아들이며 살고 있다. 더 이상 어리석게 빚을 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십 몇 억 짜리 신혼집에 들어간다는 친구, 결혼식에만 2억을 쓴다는 친구를 보면서도 이제는 흔들리지 않을 만큼 단단해졌다.

스무 살의 내가 더 건강하고 단단한 자아를 가졌다면 덜 상처 받았을 텐데 싶다. 빚으로 얼룩진 스무 살이 슬프지만은 않다. 이 시절이 없었다면 평생을 노력해도 벌 수 없는 돈을 가진 남자와 사랑 없이 결혼을 했을 거고, 모든 가치를 뒤로 한 채 돈만 벌어 모으는 삶을 살고 있겠지. 스무 살의 경험은 아팠지만 값졌다. 그때의 내가 갖고 싶었던 건 명품 가방이 아니라 있는 집 동갑내기들의 구김살 없는 웃음이었다.

1000원짜리 떡볶이를 먹으며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던 쌍문동의 우리들은 알고 있다. 부모님이 얼마나 본인보다 나은 삶을 우리에게 주려고 노력했는지. 백 원 아껴 저금해 마련한 작은 집에서 자식에게 바친 엄마, 아빠의 삶을 받아먹으며 쑥쑥 컸다. 나도 아마 우리 엄마와 비슷한 모습으로 살며 아이를 낳을 거다. 다만 얼룩진 내 마음이 미래의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딱 하나다. 스무 살의 내 딸과 아들은 빈부격차 앞에서 청년의 시간이 빚에 가리지 않을 만큼 단단해지도록 도와줄 거다.
#청년 #스무살 #카드빚 #빈부격차 #신용불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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